웹소설 · 새벽배송 기사가 신선의 주문을 받았다
2화. 잠수교 아래의 반품
거절할 수 있는 버튼은 자유가 아니라 책임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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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수락 버튼을 누른 직후 수면이 갈라졌을 때, 도윤은 영화처럼 물이 양쪽으로 벌어지며 굉음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강은 소리를 삼켰다. 검은 물살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고, 그 사이에 젖은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 표면에는 금빛 원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있었다. 편의점 바코드처럼 보이기도 했고, 절에서 본 오래된 만다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윤은 탑차 적재함을 돌아보았다. 검은 상자는 그대로였다. 옆면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그게 잠든 눈인지 기다리는 눈인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배송 경로가 열렸습니다.`
`주의: 회수품을 물에 담그지 마십시오.`
도윤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배송지가 수면 아래 3미터인데 물에 담그지 말라니, 앱도 사람을 놀릴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상자를 품에 안았다. 상자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체온처럼 미지근했다.
첫 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도윤의 운동화 밑창에서 물이 사라졌다.
젖어 있던 계단이 아니라 물의 모양을 한 길이었다. 밟으면 단단했고, 발을 떼면 다시 흔들렸다. 계단 옆으로는 한강 물이 벽처럼 솟아 있었고, 그 벽 안쪽에서 밤의 도시 불빛이 부서져 흘렀다.
도윤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물속을 걷고 있는데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대신 귀가 먹먹했다. 멀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다리 위를 밟는 타이어 소리, 강변에서 웃는 사람들 목소리가 솜에 싸인 것처럼 흐려졌다.
세 번째 계단에서 상자가 다시 긁혔다.
이번에는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무언가가 물벽 너머에서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도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야 끝에 기다란 손가락 비슷한 것이 비쳤지만, 그는 상자 모서리를 더 세게 잡았다.
“보지 마.”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인기척만 남겼다.
목소리는 수면에서 올라왔다.
도윤은 멈췄다.
물벽 안쪽에 여자의 얼굴이 떠 있었다. 백리연이었다. 아니, 백리연과 닮은 얼굴이었다. 폐터널에서 보았던 흰 옷의 여인은 차갑고 단단했지만, 지금 수면에 비친 얼굴은 숨을 쉬다 만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백리연 씨입니까?”
“이름을 바로 부르지 마. 물밑에서는 이름이 닻이 된다.”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말 한마디도 잘못하면 배송비보다 큰 값을 치를 것 같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수령인.”
“이번 수령인도 당신입니까?”
물속 얼굴이 살짝 웃었다.
“아니. 나는 네가 물속에서 첫 실수를 하지 않도록 붙여 둔 영수증이다.”
영수증. 도윤은 그 단어가 이렇게 불길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휴대폰 화면이 저절로 켜졌다.
`동행 안내자: 백리연의 잔영`
`유효 시간: 17분`
계단은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강바닥이 보일 줄 알았지만, 깊이는 한강의 깊이가 아니었다. 다섯 걸음 내려갔을 때부터 콘크리트 교각은 사라지고, 양옆으로 기와지붕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물속에 가라앉은 누각들. 창문마다 종이 등불이 켜져 있었고, 등불 안에는 불꽃 대신 작은 물고기가 헤엄쳤다.
도윤은 상자를 고쳐 안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귀반포. 잃어버린 물건들이 모이는 나루.”
“반포요?”
“네가 아는 반포 아래에,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가라앉는 반포가 있다. 지갑, 반지, 약속, 목숨, 이름. 오래된 것일수록 무거워져서 여기까지 내려온다.”
도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말이 커질수록 현실감이 작아졌다.
아래쪽 계단 끝에 작은 부두가 보였다. 부두에는 붉은 등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등 아래 누군가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우산은 검었다.
검은 종이에 흰 글자가 촘촘히 적혀 있었지만, 도윤은 글자를 읽지 못했다. 읽으려는 순간 눈 안쪽이 따끔거렸다. 상대는 키가 작고 마른 노인이었다. 낡은 한복 위에 비닐 우비를 걸쳤고, 손에는 오래된 카드 단말기를 들고 있었다.
“천로배송?”
노인이 물었다.
도윤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내밀었다. 앱 화면에는 배송지 도착 표시가 떠 있었다.
노인은 화면을 보더니 혀를 찼다.
“인간 기사라니. 요즘 길이 많이 굶었군.”
“수령인 맞습니까?”
“수령인은 아니고 검수인이지. 물건은 내게 먼저 보여야 한다.”
도윤은 상자를 한 걸음 뒤로 물렸다.
“앱에는 배송지만 나와 있습니다. 검수인 얘기는 없습니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도윤은 알았다. 이쪽도 앱의 규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노인은 웃었다.
“배송기사답군. 약관을 들먹이는 얼굴이 아주 얄밉다.”
“저는 약관도 제대로 못 봤습니다.”
“그래도 본능은 있네. 좋은 기사는 문 앞에서 물건을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는다.”
노인이 우산을 접었다. 검은 종이가 안쪽으로 말리며 작은 새처럼 변하더니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났다.
부두 뒤쪽에 가게 간판이 보였다.
`반품상회`
간판은 한글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보다, 너무 익숙한 글자가 이상한 곳에 걸려 있을 때 사람은 더 쉽게 흔들린다.
노인은 벽의 명단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강도윤 기사님. 귀문 조각 회수하러 오셨지?”
도윤의 목이 굳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도 고객 관리 정도는 해.”
반품상회 안은 시장과 창고 사이 어딘가였다.
선반에는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택배 박스, 나무 함, 비단 보자기, 유리병, 사람 손바닥만 한 관. 물건마다 반품 사유가 붙어 있었다.
`주인 사망`
`계약 불이행`
`사용자 실종`
`소원 과다 청구`
도윤은 마지막 문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원도 반품합니까?”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대부분은 그래. 빌 때는 싸 보이고, 받을 때는 비싸지.”
도윤은 상자를 내려놓지 않았다. 노인은 단말기를 두드리며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산대 뒤 벽에는 수십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몇 이름 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강도윤`
줄은 아직 그어져 있지 않았다.
도윤은 계산대 앞에서 멈췄다.
“저기 제 이름 왜 있습니까.”
“예약 명단.”
“무슨 예약이요.”
노인은 단말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반품될 사람.”
도윤의 손가락이 상자 손잡이를 파고들었다. 한 번의 배송으로 인생이 이상해진 건 알았지만, 자기 이름이 물건처럼 벽에 붙어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사람은 반품 물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늘 그렇게 말해. 그런데 계약서에는 대체로 다른 말이 적혀 있지.”
노인이 단말기를 돌려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도윤의 이름, 생년월일, 어머니 이름, 빚 액수, 배송 기록까지 떠 있었다.
그 아래 작은 문구가 있었다.
`회수 우선권: 천로배송`
노인이 손톱으로 그 줄을 톡 쳤다.
“아직 네가 살아 있는 이유다.”
도윤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살아 있는 이유가 자기 의지가 아니라 배송 앱의 우선권이라니. 웃기고 모욕적이고, 동시에 무시할 수 없었다.
“반품상회가 저를 회수하려고 했습니까?”
“원래는 오늘 새벽이었다. 폐터널에서 길이 열리기 전까지는.”
도윤은 검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든 게 귀문 조각입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 옆의 작은 저울을 꺼냈다. 저울 한쪽에는 유리 그릇이, 다른 한쪽에는 말라붙은 부적 조각이 놓여 있었다.
“물건 올려.”
“수령인에게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고집 세네.”
노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선반 위의 상자들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 안에서 웃음소리, 울음소리, 물 끓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도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백리연의 잔영이 상자 표면에 비쳤다.
“검수는 허락해도 개봉은 허락하지 마.”
도윤은 낮게 물었다.
“왜요?”
“귀문 조각은 문이 아니다. 문을 기억하는 파편이다. 열면 네가 보고 싶어 하는 문으로 변한다.”
보고 싶어 하는 문.
도윤은 바로 어머니 가게를 떠올렸다. 닫힌 셔터, 어지러운 장부, 웃지 못하는 어머니의 얼굴. 만약 상자가 그 문으로 변한다면 그는 망설일 자신이 없었다.
노인은 젖은 우비 소매를 천천히 걷었다.
“누구랑 얘기해?”
“영수증이요.”
“하.”
노인은 처음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
“백리 가문 잔영을 붙여 보냈군. 그쪽도 아직 장사할 줄 아네.”
도윤은 그 말에서 단서를 잡았다.
백리연은 단순한 수령인이 아니었다.
검수는 짧게 끝났다.
상자를 저울 가까이 가져가자 유리 그릇 안의 물이 검게 변했다. 노인은 그걸 보더니 단말기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진품.”
“그럼 배송지까지 안내해 주십시오.”
“잠깐. 회수품에는 미납금이 붙어 있어.”
“배송비에서 떼 가는 겁니까?”
“아니. 네 몸에서.”
노인이 웃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도윤은 웃지 않았다. 이곳에서 농담은 대개 먼저 죽은 사람의 말투를 빌려 오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추가 요금 청구 감지`
`천로배송 기사 보호 규정 발동`
`요금 분쟁은 배송 완료 후 처리됩니다.`
도윤은 화면을 보며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앱이 처음으로 도움이 됐다.
노인은 단말기를 세게 내려쳤다.
반품상회 바닥이 흔들렸다.
선반 뒤쪽에서 낡은 문 하나가 열렸다. 문 너머에는 어둠이 있었고, 어둠 속에서 물방울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중력이 뒤집힌 공간이었다.
“저기로 가.”
노인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수령인은 저 아래 있다. 다만 살아 있는 손으로 물건을 넘기려면 조심해라. 귀반포는 잃어버린 물건을 놓아주지 않는다.”
도윤은 문 앞에서 멈췄다.
“당신은 왜 도와주는 척합니까?”
“척이 아니야. 나는 장사꾼이고, 물건이 제자리로 가야 다음 물건이 들어온다.”
“그럼 제 이름은요.”
노인은 벽의 명단을 보지 않고 말했다.
“네 이름은 아직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가격을 물었다.”
“누가요.”
“그 질문은 배송비 오백만 원짜리가 아니야.”
문을 넘자 공기가 바뀌었다.
물속인데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짠 냄새가 아니라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품고 있었다. 도윤은 좁은 복도를 걸었다. 벽은 회색 콘크리트가 아니라 젖은 서류철로 되어 있었다. 종이마다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고, 몇 장은 도윤이 아는 세상의 양식과 닮아 있었다.
대출 계약서.
임대차 계약서.
병원 동의서.
배송 위탁 계약서.
그는 마지막 단어 앞에서 멈추었다. 벽에 붙은 서류 한 장에 자기 서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계약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었다.
백리연의 잔영은 물빛 그림자처럼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멈추지 마. 여기서는 읽는 순간 동의가 된다.”
도윤은 이를 악물고 시선을 떼었다.
세상에는 안 읽어서 당하는 계약도 있고, 읽어서 걸리는 계약도 있었다.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녹슨 금속문 위에는 층수 대신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어제`
`오늘`
`내일`
버튼은 셋뿐이었다.
도윤은 휴대폰을 보았다. 앱은 아무 안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상자에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아주 희미하게 긁는 소리가 났다. 긁는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오른쪽 버튼에는 `내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배송지는 오늘 23시 59분까지인데 내일로 가도 됩니까?”
백리연의 잔영이 수면처럼 흔들렸다.
“귀문 조각은 시간 밖에서 부서졌다. 오늘 안에 배달하려면 내일에서 찾아야 한다.”
“그 말, 고객센터에 문의하면 설명해 줍니까?”
“고객센터는 이 일로 세 번 망했다.”
도윤은 내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은 비어 있지 않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남지 않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도윤의 물류센터 출입증이 들려 있었다.
“강도윤 씨.”
남자가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여기까지 오셨네요.”
도윤은 상자를 뒤로 뺐다.
“누구십니까.”
“채권 쪽 사람이라고 해 두죠. 현실에서 부르는 이름이 편하시다면.”
“사채업자?”
“그 단어는 너무 거칠고, 우리 일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회수합니다. 돈, 물건, 약속, 사람. 갚지 않은 건 언젠가 돌아와야 하니까.”
도윤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길어졌다.
그림자 끝에 작은 가격표가 달려 있었다.
남자가 손을 들자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층수 표시가 빠르게 바뀌었다. 내일, 모레, 다음 달, 내년. 숫자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빚들이 지나갔다. 도윤은 숨이 조여 오는 걸 느꼈다.
“상자 넘기면 현실 쪽 빚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잠깐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어머님 가게도 건드리지 않죠. 원하시면 물류센터에서 더는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정확히 필요한 곳을 찔렀다. 돈, 어머니, 일. 누군가 그의 하루를 아주 세심하게 들여다본 뒤 만든 제안이었다.
“대신 뭘 가져갑니까.”
“작은 문 하나.”
“무슨 문.”
“당신이 다시는 도망칠 수 없게 하는 문.”
도윤은 눈을 떴다.
거절할 이유는 충분했다. 문제는 거절할 힘이었다.
엘리베이터 조명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만 남았다.
“강도윤 씨, 당신은 이미 한 번 선택했습니다. 수락 버튼을 눌렀죠. 책임 있는 사람인 척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책임이라는 건 대개 돈이 없을 때 가장 비싸집니다.”
도윤은 상자 모서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은 맞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책임을 가격으로만 계산하는 사람은 편하겠네요.”
“가격 없이 책임을 말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합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도윤은 몸을 틀었다. 차가운 줄이 어깨를 스치며 벽에 박혔다. 줄 끝에는 작은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격투기장에서 배운 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를 좁혀야 할 때와 벌려야 할 때는 안다.
도윤은 앞으로 뛰었다.
남자는 도윤이 도망칠 거라 생각한 듯했다.
그 한 박자가 도윤에게 틈이 됐다. 도윤은 상자를 가슴에 붙이고 어깨로 남자의 몸을 밀었다. 엘리베이터 벽이 울렸다. 남자의 웃음이 끊겼다.
도윤은 주먹을 쓰지 않았다. 상자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대신 무릎으로 상대의 허벅지를 찍고, 발등을 밟았다. 현실의 싸움은 화려하지 않다. 아프고 좁고, 숨 쉴 틈을 빼앗는 쪽이 먼저 산다.
남자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일어나 도윤의 발목을 감았다.
도윤은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상자 옆면의 눈이 번쩍 떴다.
눈동자 안에서 금빛 선이 튀어나와 그림자를 잘랐다. 남자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회수품이 배송기사 보호에 동의했습니다.`
도윤은 숨을 삼켰다.
물건도 동의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쏟아졌다. 바깥은 강바닥이 아니었다. 도윤은 넓은 지하 승강장에 서 있었다. 선로는 물로 되어 있었고, 플랫폼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얼굴은 모두 젖은 종이처럼 흐릿했다.
천장에는 목적지가 떠 있었다.
`수면 아래 3m`
이상하게도 이제야 배송지와 맞았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천히 몸을 폈다.
“운 좋네요.”
“운은 방금 좀 쓴 것 같습니다.”
도윤은 플랫폼으로 걸어 나왔다. 승강장 끝에 푸른 문이 있었다. 문 앞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빈 잔 하나가 있었다.
백리연의 잔영은 물빛 그림자처럼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잔에 숨을 담아.”
“숨을요?”
“수령인이 죽은 자면 도착 확인을 그렇게 한다.”
도윤은 잔 앞에 섰다.
숨을 담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폐터널에서 향을 피우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잔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흰 김이 잔 안에 고였다.
곧 김은 작은 구슬처럼 굳었다. 구슬 안에는 도윤의 얼굴이 비쳤다. 지친 얼굴. 겁먹은 얼굴. 그래도 아직 상자를 놓지 않은 얼굴.
푸른 문이 열렸다.
그 안쪽에는 관 하나가 떠 있었다. 나무 관이 아니라 비취로 만든 관이었다. 관 표면은 여러 곳이 깨져 있었고, 깨진 틈마다 검은 물이 새어 나왔다.
도윤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수령인 확인 부탁드립니다.”
관 안에서 손이 나왔다.
뼈만 남은 손이었다.
하지만 손목에는 고운 은팔찌가 남아 있었다.
도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뼈손은 상자를 받지 않았다. 대신 상자 옆면을 천천히 쓸었다. 검은 상자가 떨리더니 봉인이 하나씩 풀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깨진 비취 조각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조각 하나. 그런데 조각 안에는 문이 수백 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산문, 지하철 개찰구, 병원 중환자실 문, 어머니 가게의 셔터, 폐터널의 어둠. 모두 같은 조각 안에서 겹쳐졌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늦었다.
어머니 가게의 셔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셔터는 반쯤 찌그러져 있었고, 그 앞에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뒤돌아보았다.
아까 엘리베이터의 남자였다.
“거래는 아직 가능합니다.”
환영 속 남자는 흐린 손을 들었다가 금세 사라뜨렸다.
도윤은 눈을 뜨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상자는 이미 열렸고, 귀문 조각은 그가 가장 걱정하는 문을 골랐다. 백리연의 경고가 늦게 이해됐다. 보고 싶은 문으로 변한다는 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문으로 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강도윤.”
백리연의 잔영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닻이 된다던 말이 떠올랐다. 물밑에서 이름은 위험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름이 도윤을 붙잡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들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면에 비친 백리연의 얼굴이 깨지고 있었다.
“문을 닫아. 네가 가진 현실의 손으로.”
현실의 손.
도윤은 상자를 안고 있던 오른손을 보았다. 손등에는 물류센터에서 긁힌 상처가 있었다. 피가 아주 조금 배어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손바닥으로 비취 조각을 덮었다.
뜨거웠다.
물속인데도 불에 댄 것처럼 손바닥이 타들어 갔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비취 조각 안쪽에서 어머니 가게의 셔터가 닫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닫히면 어머니가 위험해 보였고, 열리면 더 위험해 보였다.
문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 열려도 문제, 닫혀도 문제. 중요한 건 누가 손잡이를 잡고 있느냐였다.
도윤은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배송 완료 전에는 아무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 말이 주문처럼 울렸다.
비취 관에서 나온 뼈손이 도윤의 손등 위에 겹쳐졌다. 차가운 기운이 화상을 밀어냈다. 귀문 조각은 조용해졌다.
휴대폰 화면에 초록색 표시가 떴다.
`수령인 확인 완료`
`배송 완료 처리 중`
도윤은 처음으로 무릎이 풀릴 뻔했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남자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의 윤곽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수많은 계약서 조항이 떠올랐다. 눈, 코, 입 대신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움직였다.
“완료 처리 중이면 아직 완료가 아니죠.”
남자의 손에서 검은 줄이 뻗었다. 이번에는 도윤이 아니라 비취 관을 향했다. 수령인이 당하면 배송도 끝나지 않는다. 도윤은 몸을 던졌다.
줄이 그의 팔을 감았다.
살갗이 찢어지는 느낌이 왔다. 도윤은 비명을 삼키고 줄을 잡아당겼다. 상대도 당겼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도윤은 반대로 한 걸음 앞으로 갔다.
남자의 균형이 흔들렸다.
도윤은 팔에 감긴 줄을 상자 모서리에 걸었다.
검은 상자의 눈이 다시 떴다.
눈동자가 줄을 물었다.
물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상자의 옆면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금빛 동공이 검은 줄을 삼켰다. 남자의 얼굴에 떠 있던 조항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회수품을 무기로 쓰다니.”
“무기가 아니라 동의한 보호 장치라면서요.”
도윤은 자기 말이 맞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 세계는 말의 모양을 중시했다. 제대로 말하면 길이 열리고, 틀리게 말하면 목이 잠기는 곳. 그는 방금 배운 규칙을 바로 써먹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배송기사 주장 접수`
`임시 인정`
도윤은 웃을 뻔했다.
임시 인정. 이 앱은 칭찬도 계약서처럼 했다.
남자가 물러섰다.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다. 다음 공격을 고르는 거리였다.
비취 관이 열렸다.
그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젖은 흰 도포 한 벌과 은팔찌 하나, 그리고 작은 명패가 놓여 있었다. 명패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도윤은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백리연의 잔영이 흔들렸다.
“백리설.”
도윤은 핸들을 잡은 손가락을 천천히 풀었다.
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몰랐다. 폐터널에서 백리연과 함께 들었던 이름. 죽은 지 318년 된 신선. 어쩌면 이 회수품의 진짜 주인.
비취 조각이 명패 위에 내려앉았다.
플랫폼의 물길이 한 번 크게 울렸다. 도시의 소음이 되돌아왔다. 자동차, 바람, 멀리서 지나가는 지하철의 진동. 현실이 다시 가까워졌다.
휴대폰 화면에 드디어 문구가 떴다.
`배송 완료`
`정산 예정 금액: 5,000,000원`
`기사 등급 평가 중`
남자는 박수를 쳤다.
느리고 건조한 박수였다. 축하라기보다 다음 청구서를 넘기는 소리에 가까웠다.
“축하합니다. 두 번째 배송까지 살아남으셨네요.”
도윤은 상자를 빈손으로 들고 있었다. 이상하게 가벼웠다. 안쪽의 눈도 사라졌다. 그냥 검은 상자였다. 조금 낡고, 모서리가 찍힌 평범한 배송 상자.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돈을 낸 편.”
“그럼 누가 돈을 냈습니까.”
“오늘은 반품상회. 어제는 당신의 현실 채권자. 내일은 아마 다른 손님이겠죠.”
도윤은 한 걸음 다가갔다.
“내 이름에 가격 물은 사람도 당신 손님입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분명했다.
플랫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령이 끝난 장소는 오래 버티지 않는 듯했다. 물 선로가 갈라지고, 하얀 옷의 사람들은 하나씩 흐릿해졌다. 백리연의 잔영도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도윤이 물었다.
“배송 완료 알림을 따라가.”
“다음에도 이런 식입니까?”
잔영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네가 길을 고르게 될 거야. 그게 더 위험하다.”
도윤은 휴대폰을 보았다. 지도 앱처럼 화살표가 떠 있었다. 하지만 방향은 위가 아니라 옆을 가리켰다. 플랫폼 끝의 광고판 아래, 물살에 반쯤 잠긴 비상구가 있었다.
광고판에는 웃는 여자 모델이 있었다. 문구는 알아볼 수 없게 지워져 있었지만, 모델의 손에는 배송 상자가 들려 있었다.
도윤은 기분이 나빠졌다.
비상구를 열자 바로 잠수교 아래였다.
도윤은 젖은 바닥에 쓰러지듯 나왔다. 한강 바람이 폐로 들어왔다. 진짜 공기였다. 매연 냄새, 물비린내, 젖은 콘크리트 냄새. 불쾌하고 익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탑차는 그대로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 오십팔분이었다. 물속에서 그렇게 오래 걸은 것 같았는데, 현실에서는 팔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입금 알림이었다.
`5,000,000원 입금`
도윤은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돈이 들어왔다는 안도감보다 더 무거운 것이 팔에 남아 있었다. 검은 줄에 감긴 자국이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오늘은 잘 막았네요.`
`하지만 어머님 가게 문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도윤은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울린 뒤 어머니가 받았다. 잠긴 목소리였다.
“도윤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도윤은 잠깐 말을 못 했다. 살아 있는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힘이 빠졌다.
“가게 문 잠갔어?”
“당연히 잠갔지. 너 또 무슨 일 있니?”
“아니. 그냥 확인하려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밥은 먹었고?”
그 질문에 도윤은 웃었다. 물속 시장에서 귀문 조각을 배달하고, 계약서 얼굴을 한 남자와 싸우고, 오백만 원을 입금받은 뒤에도 어머니가 묻는 건 밥이었다.
“먹을게. 지금.”
전화를 끊자 천로배송 앱이 열렸다.
`기사 등급: 임시 2단계`
`신규 기능: 반품 거절권 1회`
`다음 주문 대기 중`
화면 아래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주의: 반품상회가 기사님의 현실 주소를 조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