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월드

웹소설 · 새벽배송 기사가 신선의 주문을 받았다

1화. 첫 주문은 폐터널로 온다

빚과 새벽배송에 묶여 있던 남자가, 폐터널에서 죽은 신선의 첫 주문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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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루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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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 기사가 신선의 주문을 받았다 1화 대표 삽화
새벽배송 기사가 신선의 주문을 받았다 1화 1쪽 삽화

새벽 네 시 십칠분.

강도윤은 세 번째로 미끄러졌다. 빗물과 흙탕물이 뒤섞인 아파트 단지 경사로에서 발목이 꺾였고, 양손에 든 보냉백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왼쪽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통증이 올라오기 전에 그는 본능적으로 팔꿈치를 틀어 계란이 든 상자부터 지켰다.

깨지면 변상이다.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는 게, 도윤은 가끔 싫었다. 무릎보다 계란, 어깨보다 고객 클레임, 허리보다 배송완료 버튼. 그렇게 순서가 바뀐 지 오래였다.

비닐 지붕 아래에서 경비원이 그를 보았다. 도와주려는 눈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나타나는 젖은 사람 하나를 보는 눈이었다.

“기사님, 지하주차장으로 다니라니까요.”

“거기 차단기 안 열립니다.”

“앱에 호출하면 열려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출하면 열리는 건 아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다. 외부 차량, 임시 기사, 대체 배정. 그런 이름들은 새벽마다 문밖에서 비를 맞았다.

그는 일어나 보냉백을 다시 어깨에 걸었다. 무릎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났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느려진다. 느려지면 벌점이다.

배송완료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이 짧게 떨었다.

`잔여 배송 18건`

숫자를 보는 순간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 열여덟 집. 그 뒤에는 반품 회수 세 건. 그리고 여섯 시 반까지 물류센터에 돌아가 스캔 누락을 확인해야 했다.

도윤은 계단을 내려오며 귀에 꽂은 이어폰을 눌렀다. 통화는 이미 세 통째 울리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가 아니었다. 저장하지 않았을 뿐이다.

“강도윤 씨. 오늘 입금 약속일입니다.”

그는 대답 대신 숨을 골랐다. 새벽 공기가 폐에 들어오자 기침이 나왔다.

“압니다.”

“알면 넣으셔야죠. 오전 중으로 안 들어오면 어머니 가게 쪽으로 갑니다.”

도윤의 손가락이 보냉백 끈을 파고들었다.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럼 돈을 주시면 됩니다.”

말은 쉽다. 돈을 주면 된다. 빚은 늘 그렇게 생겼다. 말로는 한 줄인데, 살아서는 몸 전체를 갉아먹는다.

도윤은 통화를 끊지 않았다. 끊으면 다시 건다. 다시 걸면 더 거칠어진다. 그는 상대가 욕을 몇 마디 더 하고 스스로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 화면에 배송앱 알림이 떠 있었다.

`긴급 추가 배정`

도윤은 눈을 찌푸렸다. 배정 시간이 아니었다. 새벽 배송은 이미 마감됐고, 추가 배정은 보통 취소 물량이나 누락 물량이었다. 돈은 조금 더 붙지만, 동선이 망가진다.

그는 거절 버튼을 찾았다.

없었다.

화면에는 낯선 앱 이름이 떠 있었다.

`천로배송`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그런 앱을 설치한 적이 없었다.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닌, 검은 바탕 위에 아주 얇은 금색 선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원 안에는 글자처럼 보이는 획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광고인가.

그는 화면을 아래로 쓸어 알림을 지우려 했다. 지워지지 않았다. 길게 눌러도 설정창이 뜨지 않았다.

`첫 주문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령지: `은하로 17길 폐터널 입구`

배송품: `무게 없음`

배송비: `3,000,000원`

도윤은 숫자를 다시 보았다. 삼만 원이 아니었다. 삼백만 원이었다.

사기다.

도윤은 바로 그렇게 판단했다. 세상에 삼백만 원짜리 배송은 없다. 있어도 그걸 새벽 네 시에 무릎 까진 기사에게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화면에는 계좌 입금 예정 시간까지 적혀 있었다.

`배송완료 즉시 정산`

은행 앱의 빚 알림이 머릿속에서 같이 울렸다. 오전 중 입금. 어머니 가게. 사채업자 목소리. 거절해야 한다는 판단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같은 속도로 부딪혔다.

도윤은 탑차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앞유리에 빗물이 세차게 부딪혔다. 그는 핸들을 잡은 채 한동안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폐터널은 알았다. 은하로 17길 끝. 몇 년 전 산사태로 막힌 옛 도로였다. 지도앱에서는 길이 끊겨 있고, 밤에는 배달기사들도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

배송품이 무게 없음이라니.

그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빈 보냉박스 사이에 작은 종이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명 없던 물건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받는 사람 이름 대신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백리연 전`

도윤은 봉투를 만지지 않았다.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평소 습관이었다. 문 앞 배송도, 파손 의심 물건도, 고객이 이상한 요청을 남긴 것도 전부 사진으로 남긴다. 말로 싸우면 진다. 기록이 있어야 버틴다.

카메라를 켜자 화면이 검게 죽었다.

다시 켜도 같았다. 봉투가 화면 안에 들어오는 순간, 렌즈가 먹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도윤은 혼잣말을 뱉었다. 무섭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섭다고 인정하면 그다음부터 모든 소리가 커진다. 빗소리, 엔진음, 빈 박스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사람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봉투를 집었다.

가벼웠다. 정말 무게가 없었다. 종이봉투의 감촉은 있는데 손목에는 아무 부담도 없었다. 안에는 긴 물건 하나가 들어 있는 듯했지만,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휴대폰이 다시 떨렸다.

`제한 시간: 41분 32초`

`주의: 배송품을 개봉하지 마십시오.`

도윤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면 아직 버틸 만하다.

“열지 말라면 꼭 열고 싶게 만들지.”

그는 열지 않았다.

폐터널로 가는 길은 지도앱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은 길을 알았다. 예전엔 그쪽으로 조깅을 했다. 격투기 체육관에서 시합 준비를 하던 때, 체중을 빼려고 새벽마다 산길을 뛰었다. 그때는 새벽이 이렇게 밉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도 목적이 있었다.

지금은 목적보다 독촉이 많았다.

탑차가 산길로 접어들자 휴대폰 내비게이션이 저절로 바뀌었다. 평소 쓰던 지도앱이 아니었다. 검은 화면 위에 금색 선 하나가 나타나 도로를 그렸다. 길은 현실의 도로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휘어 있었다.

도윤은 속도를 줄였다.

오른쪽 가드레일 너머로 오래된 산길이 보였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폭, 풀에 반쯤 먹힌 시멘트길. 지도에는 없지만 내비는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좋다. 사기면 신고하고 끝.”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신고할 마음은 없었다. 신고할 시간도 없었다. 삼백만 원이라는 숫자가 이미 판단을 더럽혔다.

탑차는 풀을 밀며 산길로 들어갔다.

5분쯤 달렸을 때, 비가 멈췄다.

정확히는 탑차 주변만 멈췄다. 앞유리 바깥 먼 나무들은 여전히 빗줄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헤드라이트가 닿는 길 위에는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도윤은 와이퍼를 껐다.

그제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딸랑.

방울 소리였다. 산속에 절이 있는 건 알지만, 이 시간에 종이 울릴 리 없었다. 더구나 소리는 앞에서 나는 게 아니라 탑차 적재함 안에서 들렸다.

딸랑.

도윤은 차를 세우지 않았다. 세우면 뒤를 봐야 한다. 뒤를 보면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핸들을 더 세게 잡고 내비의 금색 선만 보았다.

`잔여 거리 800m`

`수령인 대기 중`

수령인.

폐터널에서 누가 기다린다는 말인가.

휴대폰 화면 아래쪽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떠올랐다.

`수령인의 사망 시각: 318년 전`

도윤의 발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탑차가 멈추자 엔진음도 같이 꺼졌다.

시동을 끈 적이 없었다.

도윤은 바로 다시 키를 돌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배터리 경고등도, 계기판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 화면만 더 선명하게 빛났다.

`배송 지연 시 위약금이 발생합니다.`

“위약금?”

도윤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탑차 안에서 이상하게 작게 들렸다.

`차감 항목: 수명 3년`

그는 휴대폰을 던지려다 멈췄다. 던져도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은 보통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가장 무섭다.

적재함 쪽에서 다시 방울이 울렸다.

이번에는 봉투가 스스로 움직였다. 조수석 발밑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마치 빨리 가자는 것처럼 도윤의 신발 앞에 멈췄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격투기장에 올라가기 전에도 이렇게 숨을 골랐다. 상대가 강해도, 관중이 야유해도, 심장이 너무 빨라도, 숨을 놓치면 먼저 진다.

도윤은 봉투를 집고 차 문을 열었다.

밖은 조용했다.

비가 탑차 뒤쪽 경계에서 멈춰 있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는 것처럼 빗줄기가 일정한 선 밖으로만 떨어졌다. 도윤은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비가 닿았다가, 손목 안쪽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라졌다.

말이 안 된다.

그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계속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폐터널 입구는 멀지 않았다. 오래된 철제 차단기가 휘어져 있고, 그 뒤로 검은 입구가 벌어져 있었다. 터널 벽에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었지만 글자가 반쯤 벗겨졌다.

도윤은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걸었다.

세 걸음.

휴대폰이 떨렸다.

`도보 배송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일곱 걸음.

`배송기사의 신체 손상은 보상 대상이 아닙니다.`

도윤은 욕을 삼켰다. 이 앱은 말투까지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터널 안은 바깥보다 밝았다.

빛이 있는 건 아니었다. 벽면에 낀 이끼와 물자국이 아주 옅게 푸른빛을 냈다. 도윤이 발을 들일 때마다 바닥의 물웅덩이가 파문을 만들었고, 파문 속에는 터널 천장이 아니라 낯선 하늘이 비쳤다.

높은 산.

구름 위의 다리.

검은 깃발을 단 전각.

도윤은 시선을 돌렸다. 오래 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터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었구나.”

여자 목소리였다. 어리게 들리기도 했고, 아주 늙게 들리기도 했다.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배송 예정 시간 안입니다.”

입에서 나온 말이 자기 귀에도 어이없었다. 죽은 지 318년 된 수령인에게 할 첫마디가 배송 예정 시간 안이라니.

어둠 속에서 흰 도포 자락이 보였다.

“아직 농을 할 정신은 있구나. 다행이다.”

수령인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사람처럼 보였다. 흰 도포를 입은 여자가 터널 중앙에 서 있었다.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왔고, 얼굴은 창백했다. 눈동자는 검지 않고 은색에 가까웠다.

도윤은 그녀의 발밑을 보았다.

그림자가 없었다.

“백리연 씨 맞습니까.”

“한때는 그렇게 불렸다.”

“본인 확인 필요합니다.”

여자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천로배송은 아직도 그런 절차를 남겼느냐.”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앱에 본인 확인 버튼이 떴기 때문이다.

`수령인에게 주문 암호를 요청하십시오.`

도윤은 화면을 보여 주었다.

“주문 암호가 필요하답니다.”

여자의 웃음이 사라졌다.

터널 안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오래 닫힌 상자를 여는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암호는 없다. 암호를 아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도윤은 휴대폰과 백리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배송완료 처리가 안 됩니다.”

“그것이 지금 중요한 일이냐.”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백리연의 은색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보다 이상한 관심이 먼저 떠올랐다.

“왜 그렇게 돈이 급하냐.”

도윤은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사적인 얘기는 약점이 된다. 특히 지금처럼 상대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신선인지 모를 때는 더 그렇다.

그런데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어머니 가게에 사람이 찾아옵니다. 오늘 오전까지 막아야 합니다.”

말이 끝나자 터널 바닥의 물웅덩이가 흔들렸다. 거기에 작은 분식집 간판이 비쳤다. 어머니가 새벽 장사를 준비하며 국물통을 닦는 모습도 보였다.

도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뭘 보여 주는 겁니까.”

“네 인연이다. 이 터널은 가까운 길을 보여 주지 않는다. 끊어질 길을 먼저 보여 준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암호 대체 인증 가능`

`수령인의 미련을 확인하십시오.`

도윤은 화면을 읽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련이 뭐냐는데요.”

백리연은 고개를 들었다. 터널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이 일제히 멈췄다.

“동생.”

짧은 대답이었다.

“이름은요.”

“백리설.”

그 이름이 나오자 봉투가 뜨거워졌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을 뻔했다. 종이봉투 안에서 얇은 빛이 새어 나왔다.

휴대폰 화면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미련 확인`

`주의: 배송품은 수령인의 미련을 자극합니다.`

“이거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백리연은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죽기 전에 보내지 못한 향이다. 설이가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만들었다.”

도윤은 그제야 봉투가 왜 무게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물건이 아니라, 보내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럼 받으십시오.”

도윤은 봉투를 내밀었다.

백리연은 손을 뻗다가 멈췄다. 손끝이 봉투에 닿기 직전, 터널 안쪽 깊은 곳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기이이익.

도윤은 몸을 돌렸다.

터널 바닥의 물웅덩이들이 하나씩 검게 변했다. 검은 물 위로 손가락 같은 것이 올라왔다. 사람 손은 아니었다. 너무 길고, 관절이 많고, 손톱 대신 부러진 붓끝 같은 게 달려 있었다.

백리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반품상회.”

“상회요?”

“배송되지 못한 인연을 사들이는 자들이다. 내 향을 가져가면 설이의 길이 사라진다.”

도윤은 봉투를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에게 던져라.”

“방금 못 받으셨잖아요.”

“네가 던지면 받는다. 네 손으로 건네면 저것들이 먼저 잡는다.”

도윤은 터널 바닥을 보았다. 검은 손들이 이미 그의 발목 가까이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배송 기사가 신선의 주문을 받았다 1화 15쪽 삽화

도윤은 던지지 않았다.

대신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달렸다.

백리연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무슨 짓이냐!”

“던지면 중간에 뺏길 것 같은데요!”

그는 터널 벽을 따라 뛰었다. 검은 손들은 물웅덩이에서만 올라왔다. 물을 밟지 않으면 잠시 늦어진다. 도윤은 오래전에 배운 풋워크를 몸이 기억하게 놔뒀다.

왼발은 마른 시멘트.

오른발은 벽면 튀어나온 배수 홈.

무릎이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달리면서 백리연의 위치를 봤다. 그녀 뒤쪽 벽에 작은 틈이 있었다. 틈 사이로 흰 꽃잎 같은 빛이 새어 나왔다.

“저쪽이 진짜 수령지죠?”

백리연의 눈이 커졌다.

“어찌 알았느냐.”

“배송하다 보면 압니다.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어도, 진짜 놓을 자리는 따로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도윤은 방향을 틀었다.

검은 손 하나가 도윤의 발목을 잡았다.

차가웠다. 살을 잡은 게 아니라 뼈 안쪽을 쥐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대로 넘어질 뻔했지만 봉투를 놓지 않았다. 대신 몸을 낮춰 바닥을 굴렀다.

격투기장에서 배운 낙법이 아니었다. 배송 중 계단에서 굴러도 물건부터 지키는 습관이었다.

등이 바닥에 찍히고 숨이 끊겼다. 손은 더 올라와 종아리를 감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배송품 훼손 위험`

“알아!”

도윤은 소리치며 보냉백 끈을 풀었다. 아직 안에 남아 있던 얼음팩 하나를 꺼내 검은 손 위로 내리쳤다.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얼음팩이 닿자 검은 손이 흰 연기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백리연이 외쳤다.

“냉기다. 저것들은 산 자의 열보다 식은 물건을 두려워한다.”

“그런 건 미리 말해야죠!”

도윤은 남은 얼음팩 두 개를 손에 쥐고 일어났다.

터널 끝의 틈까지는 열다섯 걸음.

검은 손은 여섯. 물웅덩이는 넷. 백리연은 움직이지 못한다. 도윤은 눈으로 거리를 재고, 머릿속에서 가장 덜 죽을 길을 골랐다.

첫 번째 얼음팩은 왼쪽 물웅덩이에 던졌다. 검은 손 두 개가 동시에 움츠러들었다.

두 번째는 던지지 않고 발밑에 밟았다.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그 짧은 얼음판 덕분에 검은 손이 발목을 잡지 못했다.

마지막 하나는 아꼈다.

틈 앞까지 세 걸음 남았을 때, 터널 천장에서 검은 물이 떨어졌다. 위에도 있었다. 도윤은 이를 악물고 봉투를 가슴에 붙였다.

그때 백리연이 손을 들었다.

움직이지 못한다던 그녀의 소매가 바람처럼 길어졌다. 하얀 천이 도윤의 어깨를 스치며 검은 물을 막았다. 천은 닿자마자 타들어 갔다.

“빨리.”

백리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도윤은 마지막 얼음팩을 천장으로 던지고 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틈 안쪽은 터널이 아니었다.

작은 방이었다. 벽도 천장도 없는데 방처럼 느껴졌다. 바닥에는 오래된 나무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 향로가 놓여 있었다. 향로 옆에는 어린아이의 신발 한 짝이 있었다.

도윤은 봉투를 내려놓으려다 멈췄다.

앱이 다시 떴다.

`최종 배송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탁자 위가 아니었다. 금색 선은 향로가 아니라 아이 신발을 가리켰다.

도윤은 봉투를 신발 옆에 놓았다.

종이봉투가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짧은 향 하나가 들어 있었다. 불도 붙이지 않았는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곧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터널 밖에서 백리연이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설아.”

그 한마디에 방 전체가 흔들렸다.

도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 남이 우는 얼굴을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배송완료 버튼이 떠올랐다.

도윤은 누르려다 멈췄다.

화면 아래에 작은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수령인의 서명 필요`

“장난하나.”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방금 죽을 뻔했고, 수령인은 귀신이고, 물건은 인연인지 향인지 알 수 없고, 그런데도 서명은 필요하단다.

백리연이 틈 밖에서 말했다.

“내 이름은 이제 이곳에 닿지 않는다.”

“그럼 누가 서명합니까.”

향 연기 속에서 작은 손이 나왔다. 아이 손이었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손은 그를 향해 뻗어 오더니, 휴대폰 화면 위에 동그란 점 하나를 찍었다.

`백리설 수령 확인`

`배송완료`

화면이 금색으로 밝아졌다.

동시에 터널 전체에서 검은 손들이 비명을 질렀다. 소리는 사람 목소리와 종이 찢어지는 소리 사이에 있었다. 도윤은 귀를 막았다.

향 연기가 흩어지고, 아이 신발 옆에는 작은 흰 꽃 하나가 남았다.

도윤이 틈 밖으로 나오자 백리연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신선이라기보다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도포는 검은 손에 찢겨 있었고, 은색 눈은 더 흐려져 있었다.

“끝난 겁니까.”

도윤이 물었다.

백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내 주문은 끝났다. 네 주문은 시작됐다.”

“저는 주문한 적 없습니다.”

“천로배송은 수령인보다 기사를 먼저 고른다. 너는 길을 본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다.”

도윤은 웃지도 화내지도 못했다.

“저는 그냥 배송기사입니다.”

“그래. 그래서 가능했다. 수선자는 하늘길을 보려 하고, 귀신은 지나간 길만 붙든다. 너는 문 앞에 물건을 놓는 자다. 문이 어디인지 안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일감이 늘어난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휴대폰이 다시 떨렸다.

`정산 중`

은행 알림이 먼저 왔다.

`3,000,000원 입금`

도윤은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진짜였다. 계좌 잔액이 바뀌었다. 그는 바로 사채업자 계좌로 돈을 보냈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실수하지 않았다.

입금 완료 화면을 확인한 뒤에야 숨이 조금 들어왔다.

그때 천로배송 앱에 새 알림이 떴다.

`첫 배송 보상 지급`

`기본 배송비 외 추가 보상: 길눈 1단계`

“길눈?”

도윤이 중얼거리자 터널 벽의 균열들이 다르게 보였다. 금 간 방향, 물이 흐른 길, 방금 검은 손들이 지나간 흔적. 전부 선으로 이어졌다. 그 선들은 터널 밖으로, 산길 아래로, 멀리 도시 쪽으로 뻗어 있었다.

도윤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선이 보였다.

백리연은 흰 도포 자락 끝을 물결 위에 놓았다.

“익숙해져라. 이제 세상의 길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환불은 됩니까.”

“천로배송에 환불은 없다.”

도윤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욕을 했다.

터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먼지였다. 그다음 작은 돌이 떨어졌고, 곧 천장 전체가 낮게 울었다. 백리연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도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가라.”

“당신은요.”

“나는 이곳에 묶인 미련이었다. 배송이 끝났으니 사라진다.”

도윤은 그녀의 말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다. 사람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사라진다는 말을 듣자 이상하게 화가 났다.

“그럼 왜 저를 불렀습니까. 그냥 향만 보내면 되잖아요.”

“기사 없이는 주문이 닿지 않는다.”

“그런 말 말고요.”

백리연은 잠시 침묵했다.

“누군가 아직 길 위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천장에서 큰 돌이 떨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백리연의 몸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강도윤.”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 주문을 거절하지 마라. 반품상회가 네 이름을 보았다.”

도윤은 터널 밖으로 뛰었다.

뒤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따라왔다. 돌과 물과 오래된 시간이 한꺼번에 내려앉는 소리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멈출 것 같았다.

탑차까지 도착했을 때,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경계가 사라졌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젖어 있었다. 탑차는 다시 시동이 걸렸다. 계기판도 정상이고, 와이퍼도 정상이고, 라디오에서는 새벽 뉴스가 흘러나왔다.

도윤은 운전석에 앉아 한동안 핸들을 잡고 있었다.

무릎 통증이 뒤늦게 올라왔다. 손등에는 검은 손이 스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멍이 아니라 먹물이 스민 듯한 자국이었다.

그는 사진을 찍으려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에는 카메라가 켜졌다.

사진 속 손등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직접 보면 있는데, 기록에는 남지 않는다.

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 일은 누구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물류센터로 돌아왔을 때는 여섯 시 십분이었다.

팀장은 이미 화가 나 있었다.

“강도윤 씨, 어디 갔었어요? 동선이 왜 끊겨?”

도윤은 반사적으로 사과하려 했다. 늘 하던 일이다. 잘못이 애매할 때 먼저 고개 숙이면 일이 빨리 끝난다.

그런데 오늘은 입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 산길에서 멈췄습니다.”

“그러니까 왜 산길을 가요?”

도윤은 대답 대신 스캔 누락 목록을 내밀었다.

“18건 완료했고, 반품 회수 세 건도 실었습니다. 누락 없습니다.”

팀장은 목록을 확인하고 얼굴을 구겼다. 트집 잡을 게 없을 때 사람들은 더 기분 나빠한다.

“다음부터 동선 벗어나면 배정 줄입니다.”

“네.”

도윤은 짧게 답했다. 예전 같으면 죄송합니다가 붙었을 것이다. 오늘은 붙지 않았다.

그는 탑차 적재함을 정리하다가 바닥에서 흰 꽃잎 하나를 발견했다.

폐터널의 방에 남았던 꽃과 같은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돈 보냈니? 아침에 어떤 사람들이 왔다가 그냥 갔어. 무슨 일이야?`

도윤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밝은 척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렸다.

“괜찮아. 입금했어.”

“어디서 돈이 났어?”

“일이 좀 들어왔어.”

“위험한 일 아니지?”

도윤은 대답이 늦었다.

“배송이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나빴다.

통화를 끊고 나니 몸이 한꺼번에 무거워졌다. 밤을 새워 일했고, 죽은 신선에게 향을 배달했고, 검은 손에게 잡힐 뻔했고, 그래도 오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센터 구석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았다. 손등의 검은 자국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대신 눈을 감으면 금색 선들이 보였다.

센터 바닥에도 선이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 아래, 반품 박스가 쌓인 곳으로 이어지는 얇은 선.

도윤은 캔커피를 내려놓았다.

반품 박스 더미 맨 아래에 낯선 상자가 있었다.

센터에서 쓰는 규격 박스가 아니었다. 검은 종이에 금색 실이 묶여 있었고, 송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도윤은 주변을 보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직원들은 스캔 소리와 욕설과 졸음 사이에서 각자 버티고 있었다.

상자 위에 천로배송 알림이 떴다.

`미등록 반품 발견`

`소유자: 반품상회`

도윤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백리연의 말이 떠올랐다. 반품상회가 네 이름을 보았다.

상자를 열면 안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시에 알았다. 열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 배송기사의 직감이었다. 문 앞에 놓인 이상한 상자는 그냥 두면 반드시 클레임이 된다. 그리고 이번 클레임은 고객센터가 아니라 수명으로 처리될 것 같았다.

도윤은 상자를 들었다.

무거웠다.

방금 전 향은 무게가 없었지만, 이건 현실의 물건처럼 손목을 눌렀다.

안쪽에서 누군가 손톱으로 박스를 긁었다.

도윤은 상자를 열지 않고 탑차로 가져갔다.

센터 안에서 열면 다른 사람이 휘말린다. 그 정도는 이제 알았다. 이상한 일은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 많은 곳에서 더 위험하다. 목격자가 생기면 사건이 커지는 게 아니라, 희생자가 늘어난다.

탑차 문을 닫자 상자 긁는 소리가 멈췄다.

휴대폰 화면에 새 주문이 떴다.

`긴급 회수 요청`

회수품: `분실된 귀문 조각`

회수지: `은하물류센터 B동`

배송지: `한강 잠수교 하부, 수면 아래 3m`

배송비: `5,000,000원`

제한 시간: `오늘 23:59`

도윤은 한참 화면을 보았다.

이번엔 삼백만 원이 아니었다. 오백만 원.

그리고 배송지가 물속이었다.

그는 운전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도망칠 방법을 생각했다. 앱을 지우고, 휴대폰을 버리고,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멀리 도망가는 방법.

눈을 감자 금색 선 하나가 어머니 가게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도망가도 따라온다는 뜻이었다.

점심 무렵, 사채업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도윤은 이번에는 받았다.

“입금 확인했습니다. 성실하시네요.”

“가게로 가지 마십시오.”

“오늘은 안 갑니다. 그런데 강도윤 씨.”

상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혹시 새벽에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도윤의 손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아니, 이상해서요. 우리 쪽 사람 하나가 강도윤 씨 동선 따라갔다가 연락이 끊겼거든요. 은하로 쪽에서.”

도윤은 탑차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물류센터 주차장 끝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운전석 창문은 짙게 선팅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 그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릅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요즘 그쪽 길, 사람 잘못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전화가 끊겼다.

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세상이 다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평범함 아래로 지나가는 선을 볼 수 있었다.

해가 지기 전, 도윤은 집에 들렀다.

원룸은 좁고 조용했다. 젖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는 먼저 봉투와 상자, 휴대폰을 식탁 위에 올렸다.

봉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안쪽에 작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길을 잃은 자에게 향을.`

도윤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백리연이 남긴 것인지, 백리설이 남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냉장고 문에 붙은 오래된 사진을 보았다. 젊은 시절의 자신, 글러브를 낀 채 웃고 있는 얼굴. 그 옆에는 어머니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때 그는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사람이 먼저였다.

천로배송 앱이 저절로 열렸다.

`기사 등급: 임시`

`누적 배송: 1건`

`주의 대상: 반품상회`

`다음 배송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도윤은 바로 누르지 않았다.

이번엔 알고 누르는 버튼이어야 했다.

새벽배송 기사가 신선의 주문을 받았다 1화 30쪽 삽화

밤 열한 시 오십분.

도윤은 잠수교 아래에 서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한강 바람이 차가웠다. 탑차 적재함에는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안쪽에서 긁는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대신 상자 옆면에 눈 하나가 떠 있었다.

도윤은 그 눈을 보지 않으려 했다. 오래 보면 무언가를 빼앗길 것 같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수락 버튼이 떠 있었다.

거절 버튼도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있었다.

도윤은 그게 더 무서웠다. 거절할 수 있는데도, 거절하면 누가 당할지 이미 보였기 때문이다. 금색 선은 물속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가게, 물류센터, 폐터널이 있던 산, 그리고 도윤 자신의 심장 쪽으로도 이어져 있었다.

그는 숨을 골랐다.

격투기장에 올라가기 전처럼.

새벽배송 첫 상자를 들기 전처럼.

그리고 폐터널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처럼.

“배송 시작.”

그가 버튼을 누르자 한강 수면이 조용히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