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월드

웹소설 · 오수완: 오늘도 수선 완료

4화. 요약본을 뒤집는 법

백련서가 공개 요약으로 무해문을 가해자처럼 편집하자, 한서율은 해명 글을 길게 쓰는 대신 원본 순서와 피해자의 선택권을 동시에 공개해 판을 뒤집고 첫 공덕방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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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루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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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완: 오늘도 수선 완료 4화 대표 삽화
오수완: 오늘도 수선 완료 4화 1쪽 삽화

로비 화면은 점심 메뉴 대신 한서율의 얼굴을 띄우고 있었다.

서율은 물을 뜨러 가던 길이었다. 종이컵 안에서 정수기 물이 아직 출렁였다. 화면 속 그녀는 회의실에서 날카로운 표정으로 누군가를 막아서고 있었고, 자막은 친절했다.

`신입을 앞세운 사내 문파 놀이`

그 아래로 민재온이 우는 장면이 붙었다. 앞뒤가 잘린 울음이었다. 재온이 왜 울었는지는 없고, 우는 얼굴만 있었다.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화면을 보았다. 누군가는 웃음을 참았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었다. 가장 빠른 사람은 이미 녹화 버튼을 눌렀다.

서율은 컵을 내려놓았다.

"재온 씨."

재온은 엘리베이터 옆에서 굳어 있었다. 입술은 창백했고, 손목의 금빛 실은 다시 검은 자막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공덕장이 뜨거워졌다.

[후속 수행 강제 개시]

[요약 기록 편집]

[제한 시간: 20분]

서율은 먼저 화면을 끄려고 뛰지 않았다.

끄는 순간 사람들은 더 궁금해한다. 삭제된 장면은 늘 원본보다 오래 돈다. 그녀는 예전 회사에서 그걸 너무 많이 봤다. 불타는 콘텐츠를 끄는 척하며 키우는 사람들, 정정문을 핑계로 새 제목을 뽑는 사람들.

백련서의 방식도 똑같았다. 선계라는 말만 붙었을 뿐, 구조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서율은 재온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뒤집어 쥐게 했다.

"지금은 댓글 보지 마요."

재온의 손이 떨렸다.

"제가 또 문제 만든 거죠?"

"아니요."

서율은 로비 화면을 보며 숨을 골랐다.

"문제 만든 사람이 편집을 잘한 거예요. 그럼 우리는 더 잘 편집하면 돼요."

류하진은 기둥 그늘에서 나타났다. 은빛 선이 그의 손끝에서 짧게 켜졌다.

"전광판 뒤에 붉은 꽃잎이 있다."

"자르면요?"

"영상은 꺼진다. 대신 네가 숨겼다는 기록이 남는다."

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쉬운 길은 광고처럼 생겼네요."

공덕장은 화면을 둘로 나눴다.

왼쪽에는 현재 퍼지는 요약본이 있었다. 장면 여섯 개, 자막 열두 줄, 댓글 반응 예상치. 오른쪽에는 원본 장면 조각이 백 개 넘게 쌓여 있었다. 회의실의 목소리, 익명 말풍선, 팀장의 침묵, 재온의 손목 실, 류하진이 검을 거둔 순간.

[요약 기록을 직접 정렬하십시오]

[조건: 피해자의 선택권을 훼손하지 않을 것]

[금지: 상대 악의 역이용]

서율은 화면을 보고 바로 이해했다.

"아, 이거 진짜 최악이다."

재온이 작게 물었다.

"왜요?"

"우리가 반박하려면 재온 씨 장면도 써야 해요. 그런데 잘못 쓰면 재온 씨가 또 증거가 돼요."

재온의 눈이 흔들렸다. 서율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은 재온의 공포를 키울 뿐이었다.

"선택해요. 얼굴은 가릴지, 목소리는 뺄지, 아예 등장하지 않을지."

"제가 선택해도 돼요?"

"무해문 첫 규칙."

서율은 손가락으로 공덕장 화면을 눌렀다.

"사람은 소재가 아니에요."

재온은 울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얼굴이 아니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차이가 서율에게는 중요했다. 누군가의 감정을 보호한다는 건 대신 울어 주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고를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재온은 자기 얼굴이 나온 장면 두 개를 지웠다. 손목 실이 검어지던 장면은 남겼고, 대신 얼굴을 흐리게 처리했다. 목소리도 뺐다.

"이건 남겨 주세요."

재온의 손끝이 팀장이 사과하려다 멈춘 장면을 가리켰다.

"왜요?"

"그분도 무서웠던 것 같아서요. 미워서가 아니라."

서율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백련서가 로비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회사 방문증도 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 흰 정장 끝에 붉은 연꽃 자수가 빛났다.

"좋은 선택이에요. 다만 너무 느리네요."

로비 화면의 댓글 수가 빠르게 올라갔다.

`실시간 검증 참여자 8,412`

백련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며 웃었다.

"해명은 첫 3분 안에 해야 해요. 20분은 선의가 아니라 사치죠."

서율은 대꾸 대신 장면 조각을 세 묶음으로 나눴다.

첫째, 악의가 들어온 순서.

둘째, 누가 맞았는지.

셋째, 누가 멈췄는지.

회사에서 배운 기술을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손은 빨랐다. 잘못된 쇼츠를 끊어 내던 감각, 분량을 줄이면서도 맥락을 살리던 감각, 제목 하나로 사람을 낚고 싶던 오래된 나쁜 습관까지 전부 꺼냈다.

그리고 방향을 바꿨다.

낚는 대신 돌려놓기.

부풀리는 대신 순서 보이기.

서율은 첫 장면을 로비 화면에 밀어 넣었다.

검은 말풍선이 민재온에게 닿기 직전, 서율이 막아선 장면이었다.

자막은 짧았다.

`누가 먼저 맞았는지부터 보세요.`

로비의 공기가 변했다.

웃던 사람들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직원 몇 명은 화면 확대를 멈췄다. 누군가가 "어?" 하고 작게 흘렸다.

백련서의 미소가 옅어졌다.

"감정에 기대는 편집이네요."

"그쪽 요약본은 감정 말고 뭐였는데요."

서율은 두 번째 장면을 올렸다. 익명 말풍선들이 재온의 기록 실을 검게 물들이는 순간. 얼굴은 흐렸지만 손목의 실은 선명했다.

`이 장면의 당사자가 공개 범위를 직접 골랐습니다.`

재온은 옆에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겁은 남아 있었지만, 화면에 끌려가는 느낌은 사라진 듯했다.

공덕장이 반응했다.

[선택권 보호]

[공덕 +12]

류하진은 전광판 뒤의 붉은 꽃잎을 바라보았다.

"꽃잎이 흔들린다."

"그럼 맞게 가고 있다는 뜻이네요."

서율은 곧장 세 번째 장면을 골랐다.

세 번째 장면은 팀장이었다.

서율은 그 장면을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백련서가 원하는 건 팀장을 악역으로 만들거나, 서율이 팀장을 감싸다가 같이 욕먹는 그림일 것이다. 둘 다 아니었다.

화면에는 팀장이 재온을 보며 입을 열었다가 닫는 순간이 떴다.

자막은 더 짧았다.

`멈춘 사람도 책임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로비 뒤쪽에서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회색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화면을 피하고 있었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백련서는 그를 발견하자 부드럽게 손을 펼쳤다.

"팀장님. 지금 사과하시면 서율 씨 요약에 이용당할 수 있어요."

서율은 바로 끼어들지 않았다.

팀장의 시선이 재온에게 갔다.

재온은 뒤로 숨지 않았다. 얼굴은 흐려졌지만, 현실의 본인은 여기 있었다.

팀장은 두 손을 몸 옆에 붙였다.

"민재온 씨."

이번에는 끝까지 밀어냈다.

"내가 멈췄습니다. 미안합니다."

공덕장 화면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정정 기록 발생]

[타인 강요 없음]

백련서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서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네 번째 장면을 올렸다. 팀장의 사과가 아니라, 사과 직전 백련서가 끼어든 순간이었다.

자막은 없었다.

소리가 들어갔다.

`지금 사과하시면 서율 씨 요약에 이용당할 수 있어요.`

로비의 직원들이 동시에 백련서를 보았다. 낯선 여자가 왜 회사 로비에서 저 말을 했는지, 아무도 설명을 듣지 않았지만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서율은 백련서에게 웃어 보였다.

"요약은 중립이 아니라고 하셨죠."

백련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방금 건 누구 편집이에요?"

류하진의 은빛 선이 전광판 뒤 꽃잎을 감쌌다. 자르지는 않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묶었다.

공덕장이 새 문구를 띄웠다.

[편집 주체 노출]

[검증장 균열]

백련서는 빠르게 다음 수를 꺼냈다.

로비 화면 오른쪽 아래에 투표 창이 생겼다.

`무해문 공개 검증`

`이 문파는 안전한가?`

선택지는 두 개였다.

`폐쇄 권고`

`추가 감시`

둘 다 나쁜 답이었다. 안전하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서율은 헛웃음을 삼켰다. 질문을 이렇게 만들면 사람들은 공정하게 판단했다고 믿는다.

재온이 손을 뻗었다.

"선배, 저거 누르면 안 되는 거죠?"

"누르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저 질문으로는 아무 답도 못 해요."

서율은 공덕장에 새 질문을 입력하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막혔다.

[권한 부족]

[문파 공덕방 필요]

"공덕방?"

류하진이 전광판 뒤 꽃잎을 누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문파가 외부 질문을 받는 방이다. 열면 도와 달라는 소리도 같이 들어온다."

"몇 개나?"

공덕장은 아주 정직했다.

[예상 유입: 47건]

서율은 숫자를 보고 잠깐 눈을 감았다.

47건. 이 회사 하나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백련서가 던진 요약본은 무해문을 묻기 위한 칼이었지만, 동시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재온은 서율의 표정을 읽고 먼저 물었다.

"열면 힘들어져요?"

"네."

"안 열면요?"

"저 투표가 답이 돼요."

재온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열어요. 대신 제가 당직표 만들게요."

서율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문파 당직표요?"

"회사 일도 결국 그걸로 버티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든든했다. 류하진은 잠깐 재온을 보았다. 인정인지 경계인지 모를 시선이었다.

서율은 공덕장 화면 한가운데 손가락을 눌렀다.

[무해문 공덕방 개설]

[조건: 첫 질문을 직접 바꿀 것]

서율은 기존 투표를 지우지 않았다.

지우는 대신 그 위에 새 질문을 겹쳤다. 선택지를 바꾸면 백련서가 조작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질문의 위치를 바꿨다.

`이 문파는 안전한가?`

그 아래에 서율이 새 문장을 붙였다.

`누구에게 안전해야 하는가?`

선택지는 세 개였다.

`괴롭힘을 당한 사람`

`실수한 사람`

`말을 퍼뜨린 사람`

로비의 사람들은 이번에는 쉽게 누르지 못했다. 누르는 순간 자기 위치가 드러났다. 서율은 그 망설임을 원했다.

백련서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질문을 되묻는 방식. 좋네요. 하지만 너무 방어적이에요."

"그쪽이 공격을 해서요."

"공격이 아니라 선별입니다. 무해한 문파는 결국 아무것도 못 하거든요."

서율은 첫 공덕방 알림을 보았다.

[익명 요청 1]

[저도 회의실에서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첫 요청은 길지 않았다.

`증거는 없습니다. 그냥 모두가 알고 모두가 모르는 척합니다.`

두 번째 요청이 바로 올라왔다.

`상사가 사과하면 제가 더 불편한 사람이 됩니다.`

세 번째.

`익명 게시판 때문에 퇴사했습니다. 아직도 제 이름이 검색됩니다.`

재온은 당직표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얼굴이 굳었다. 팀장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변명할 얼굴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구조를 처음 본 얼굴이었다.

백련서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보세요. 문을 열면 감당 못 할 것들이 들어오죠."

서율은 스크롤을 내리지 않았다. 들어온 것들을 한꺼번에 읽으면 또 소재가 된다. 그녀는 첫 요청 옆에 `읽음 대기`가 아니라 `호흡 대기`라고 표시했다.

"감당 못 할 걸 감당하는 척하는 게 문제였네요."

공덕장이 금빛 선을 그었다.

[공덕방 규칙 1]

[즉시 해결보다 안전한 접수]

백련서의 꽃잎이 붉게 접혔다.

전광판 뒤에서 작은 종이 문서가 생겼다. 제목은 선명했다.

`무해문 폐문 신청서`

류하진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이번에도 베지 않았다. 대신 꽃잎을 은빛 선으로 묶은 채 서율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지."

"신청서니까 반려해야죠."

"권한이 있나?"

"없으면 만들고요."

서율은 폐문 신청서를 확대했다. 신청 사유는 세 가지였다.

`공개 검증 중 여론 교란`

`피해 기록 임의 편집`

`문파 개설자의 감정 개입`

세 개 모두 사실처럼 보이게 쓴 거짓이었다. 서율은 반박문을 길게 쓰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긴 글은 백련서가 잘라 쓰기 좋다.

그녀는 사유마다 한 줄씩 원본 시간을 붙였다.

`여론 교란 전, 조작 투표가 먼저 생성됨`

`피해 기록, 당사자 직접 선택`

`감정 개입, 방어식 조건 충족`

공덕장은 아직 반려 버튼을 열지 않았다.

[반려 권한 부족]

[증인 2명 필요]

서율은 바로 재온을 보지 않았다. 또 증인으로 세우면 방금 지킨 선택권이 무너진다.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사과한 지 5분 만에 다시 공개 증언을 요구하면, 그는 책임이 아니라 공연을 하게 된다.

뜻밖에 먼저 손을 든 사람은 로비 끝의 경비 직원이었다.

"저, 화면 바뀐 순서는 봤습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는 당황해서 모자를 고쳐 썼다.

"전광판 관리 로그가 제 자리에도 뜹니다. 저 흰 정장 손님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외부 송출 예약이 걸려 있었습니다."

백련서의 미소가 사라졌다.

서율은 고개를 숙였다.

"증인으로 남겨도 괜찮으세요? 이름은 가릴 수 있어요."

경비 직원은 잠깐 생각했다.

"직책만 남겨 주세요. 이름은 아직 좀."

[증인 1 확보]

오수완: 오늘도 수선 완료 4화 15쪽 삽화

두 번째 증인은 팀장이었다.

서율은 말리지 않았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재온 씨 이야기 말고, 본인이 본 시스템만 말해 주세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광판 송출 권한은 우리 팀에 없습니다. 오늘 오전까지도 외부 검증장 연동 항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내용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과보다 중요한 증언이었다. 사과는 마음을 보이고, 증언은 구조를 건드린다.

공덕장이 두 번째 금빛 점을 찍었다.

[증인 2 확보]

[폐문 신청 반려 가능]

백련서는 손바닥을 천천히 접었다.

"반려하면 책임도 생깁니다. 47개 요청을 다 외면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서율은 버튼 위에서 멈췄다.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문을 닫으면, 백련서가 만든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꼴이었다.

서율은 반려를 눌렀다.

로비 화면이 흰 빛으로 번졌다.

`무해문 폐문 신청 반려`

`사유: 질문 조작 및 당사자 선택권 보호 확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달라졌다. 누가 이겼다는 소란이 아니었다. 각자 자기 휴대폰을 확인하는 소리, 방금 누르려던 투표에서 손을 떼는 소리, 너무 쉽게 웃었던 사람들이 목을 가다듬는 소리.

재온은 작은 숨을 내쉬었다.

"저 아직 안 끝난 거죠?"

"네. 근데 방금 끝날 뻔한 건 막았어요."

"그럼 된 거예요."

서율은 그 말이 고마웠다. 완벽한 승리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류하진은 전광판 뒤 꽃잎을 잡아당겼다. 붉은 종이가 찢어지지 않고 한 장의 명함처럼 접혔다.

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문양 하나가 있었다. 붉은 연꽃 속에 검은 눈.

류하진의 얼굴이 굳었다.

"백련서 개인 표식이 아니다."

서율은 백련서를 보았다.

"뒤에 누구 있어요?"

백련서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그 짧은 공백 때문에 대답보다 많은 것이 드러났다.

"문파를 만들면 곧 알게 됩니다. 문파는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세력의 문법이니까요."

"좋아요 공덕 모으는 소소한 앱인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믿게 만든 쪽이 더 나쁘죠."

백련서는 물러나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공덕방의 요청 수가 47에서 63으로 늘었다. 숫자가 뛰는 순간 재온의 얼굴이 다시 하얘졌다.

서율은 바로 공덕방을 닫지 않았다. 대신 접수 상태를 바꿨다.

`긴급`

`오늘은 읽지 않음`

`혼자 열람 금지`

이 세 칸을 만든 뒤에야 요청 목록을 접었다.

"우리가 오늘 다 구할 수는 없어요."

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어디까지 해요?"

"우리 문 앞에 선 사람부터."

문 앞에 선 사람은 뜻밖에도 팀장이었다.

그는 로비 한가운데서 한참 망설이다가 서율에게 다가왔다. 백련서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조금씩 흩어졌고, 전광판은 다시 점심 메뉴를 띄웠다. 하지만 로비의 공기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팀장은 휴대폰을 내밀었다.

익명 게시판 관리자 화면이었다.

"내 권한으로는 삭제가 아니라 숨김 처리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올라온 첫 글, 작성자가 내부 직원이 아닙니다."

서율은 화면을 보았다.

작성자 이름은 `연화검증_003`.

아이피는 회사 것도, 선계 것도 아니었다. 공덕장이 그 줄을 금빛으로 긁어 올렸다.

[외부 사주 흔적]

[속인록 등록 가능]

"속인록은 또 뭐예요?"

류하진이 다가와 화면을 보았다.

"문파 밖 협력자 명부. 위험하지만 쓸 만하다."

팀장이 입술을 다물었다.

"위험한 건 익숙합니다."

서율은 팀장을 바로 등록하지 않았다.

"조건이 있어요."

팀장이 긴장했다.

"재온 씨한테 착한 상사 연기 금지. 익명 게시판 정리할 때 피해자한테 '이제 괜찮죠?' 묻기 금지. 그리고 오늘 한 증언을 내일 농담처럼 소비하기 금지."

팀장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찔린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하나 더."

서율은 공덕장 화면을 돌렸다.

"게시판 로그, 원본 그대로 백업해 주세요. 지우기 전에요."

"그건 징계 사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안 하면 더 큰 징계가 올 수도 있고요."

팀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도망갈 곳을 찾는 눈이 아니었다. 자기 발밑의 선을 보는 눈이었다.

"하겠습니다."

공덕장이 조용히 열렸다.

[속인록 후보]

[박도현 팀장]

[권한: 내부 기록 보전]

재온은 팀장의 이름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율은 재온에게 결정권을 넘기지 않았다. 피해자가 모든 구조 개선의 승인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폭력이다. 대신 그녀는 재온에게 질문 하나만 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지금 불가능하면 바로 말해요. 그건 등록이랑 별개예요."

재온은 한참 뒤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진 않아요. 불편하긴 한데, 불편한 걸 제가 다 처리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맞아요."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서율은 속인록 등록을 눌렀다.

팀장의 손목에 금빛 실이 아니라 회색 고리가 생겼다. 고리는 느슨했다. 언제든 풀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류하진은 그걸 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계약은 아니군."

"우리 문파 그런 거 안 해요."

"방금은 문파답게 들렸다."

서율은 피곤하게 웃었다.

"칭찬이면 좀 더 알아듣게 해 주세요."

관리자 로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팀장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내부 게시판 글 몇 개가 사라졌다. 삭제가 아니라 비공개 보존 처리였다. 동시에 공덕장에 작은 금빛 박스가 쌓였다.

[원본 기록 보전 12건]

[악의 확산 차단 7건]

[공덕 +31]

서율은 그 숫자에 취하지 않으려 했다. 공덕은 결과가 아니라 영수증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하루가 덜 망가졌다는 흔적. 딱 그 정도로만 받아야 한다.

백련서는 떠났지만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연화검증_003`이라는 이름이 계속 화면 아래에서 깜박였다.

재온은 그 이름을 보며 물었다.

"003이면 앞에 두 명이 더 있다는 뜻일까요?"

"아마도요."

"그럼 다음은 빨리 오겠네요."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가야 해요."

류하진의 은빛 선이 복도 쪽으로 뻗었다.

"로그가 지하 기록실로 이어진다."

회사에 지하 기록실이 있다는 걸 서율은 처음 알았다.

류하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버튼에는 지하 1층까지만 있었지만, 공덕장이 비상 호출 버튼 아래에 숨은 작은 문양을 비췄다. 붉은 연꽃 속 검은 눈. 방금 꽃잎에서 본 것과 같았다.

서율은 손가락을 가까이 댔다.

버튼이 생겼다.

`B3 검증 기록 보관소`

재온이 바로 따라오려 했다. 서율은 손을 들었다.

"재온 씨는 위에서 당직표 만들어요. 그리고 공덕방 열람은 혼자 하지 말고 팀장님이랑 같이."

"선배 혼자 가면요?"

"저도 혼자 아니에요."

류하진이 옆에서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나는 협력자일 뿐이다."

"네. 그래서 데려가요."

재온은 잠깐 웃었다. 웃음이 아주 작아도, 아까보다 훨씬 살아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B3 버튼을 누르자마자 조용해졌다.

층수 표시가 사라지고, 벽면이 검은 유리처럼 변했다. 그 유리에 서율의 얼굴과 류하진의 얼굴, 그리고 뒤쪽에 없는 백련서의 미소가 희미하게 비쳤다.

서율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런 연출 너무 싫어요."

류하진은 유리 속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겁을 먹일 때는 대개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 좋은 소식이네요."

"나쁜 소식을 네 취향대로 부르지 마."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종이 냄새가 밀려왔다. 지하 3층은 사무실이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진 서가, 천장까지 꽂힌 붉은 문서함, 문서함마다 붙은 이름표.

그중 하나가 서율의 눈앞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한서율`

두 번째 문서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해문 폐문 예비안`

서율은 자기 이름이 붙은 함을 열지 않았다.

당장 보고 싶었다.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하지만 그 욕망이 바로 함정처럼 느껴졌다. 자기 기록을 먼저 열면 오늘의 길을 잃는다.

그녀는 `무해문 폐문 예비안`을 잡았다.

문서함이 차갑게 달라붙었다. 손가락 끝이 살짝 베였다. 피 한 방울이 붉은 표지에 닿자 공덕장이 경고했다.

[개문 비용 발생]

[개설자의 1일 기억 일부 차감]

"기억을?"

류하진의 손이 서율의 손목을 잡았다.

"열지 마. 기억은 기록보다 비싸다."

서율은 문서함을 놓지 않았다.

"이 안에 다음 공격이 있으면요?"

"다른 방법을 찾는다."

"시간 없다고 했잖아요."

류하진은 처음으로 제대로 화난 얼굴을 했다.

"그래서 더 잃으면 안 된다."

서율은 손목을 빼지 않았다.

둘 사이에 짧은 힘겨루기가 생겼다. 검과 술법의 싸움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포기할지 정하는 싸움이었다.

그때 공덕방에서 새 알림이 떴다.

[긴급 요청]

[저도 오늘 전광판에 뜰 예정입니다]

[발신: 연화검증_001 피해 예정자]

서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련서가 오늘만 노린 게 아니었다. 이미 다음 사람이 있었다. 폐문 예비안은 무해문을 닫는 문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순서대로 공개 망신시키는 일정표일 가능성이 컸다.

류하진도 알림을 보았다.

"한 사람을 구하려고 네 기억을 자르는 건 계산이 맞지 않는다."

"계산 말고 순서요."

서율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늘 배운 거 있잖아요. 누가 먼저 맞았는지부터 보라고."

그녀는 문서함을 열었다.

기억이 빠져나가는 느낌은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팠다면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은 물컵에서 물이 줄어드는 것처럼 조용했다. 서율은 오늘 아침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잊었다. 점심에 뭘 먹으려 했는지도 사라졌다.

대신 문서가 열렸다.

안에는 일정표가 있었다.

`연화검증_001: 사내 전광판`

`연화검증_002: 가족 단체방`

`연화검증_003: 익명 게시판`

`연화검증_004: 공덕방 내부 분열 유도`

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로비 사건은 003이었다. 앞의 둘은 이미 지나갔거나, 동시에 진행 중이다.

류하진은 문서를 훑고 곧장 한 줄을 짚었다.

`001 대상: 주하은`

서율은 공덕방 긴급 요청의 발신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3분 전.

"위치?"

[17층 총무팀 복도]

서율은 문서를 덮고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았다. 류하진이 은빛 선으로 계단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비상계단을 뛰어올랐다. 숨이 턱까지 찼고, 빠져나간 기억의 빈자리가 머리 안에서 이상하게 울렸다.

서율은 그 빈자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17층이었다.

계단참마다 붉은 꽃잎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류하진이 선으로 밀어냈고, 꽃잎은 불꽃처럼 사라졌다. 예전 같으면 서율은 꽃잎의 의미를 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묻지 않았다.

17층 문이 열리자 복도 끝 전광판이 켜지는 중이었다.

한 여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명찰에는 `주하은`이라고 적혀 있었다. 얼굴은 울기 직전인데,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전광판 자막이 올라왔다.

`총무팀 물품 횡령 의혹`

서율은 복도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첫 장면이 뜨기 직전, 서율은 전광판 전원을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공덕장으로 아예 다른 화면을 먼저 밀어 넣었다. B3에서 본 일정표였다. 이름 일부를 가리고, 공격 방식과 순서만 남긴 원본.

`이 화면은 검증이 아니라 예정된 공격입니다.`

복도에 있던 직원들이 멈췄다.

주하은은 자기 이름이 가려진 문서를 보고 무너질 듯 숨을 내쉬었다. 서율은 그녀의 팔을 잡지 않았다. 대신 화면 아래에 선택 버튼을 띄웠다.

`내 사건 공개 범위 선택`

`1. 지금은 비공개`

`2. 담당자 동석 후 일부 공개`

`3. 전체 공개`

주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1번을 눌렀다.

전광판의 횡령 의혹 영상이 검은 화면으로 접혔다. 하지만 삭제가 아니라 보류였다. 원본은 공덕방의 잠금 상자에 들어갔다.

[두 번째 피해 예정자 보호]

[공덕 +44]

백련서의 목소리가 복도 스피커에서 흘렀다.

"너무 빨라졌네요, 서율 씨."

서율은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느리다고 하셔서요."

복도 끝에서 흰 정장의 그림자가 잠깐 비쳤다. 백련서는 직접 오지 않았다. 이번엔 목소리만 보냈다.

"빨라지면 실수도 빨라집니다."

"그래서 혼자 안 보려고요."

서율은 공덕방 첫 화면을 열었다. 63개의 요청이 한꺼번에 보이지 않도록 접고, 가장 위에 새 규칙을 고정했다.

`혼자 열람 금지`

`당사자 선택 우선`

`해결보다 차단 먼저`

`증거는 원본 순서 보존`

팀장, 재온, 경비 직원, 주하은의 이름이 각기 다른 권한으로 떠올랐다. 완벽한 문파는 아니었다. 당장 무너질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방은 생겼다.

류하진은 서율을 보았다.

"기억 하나를 잃고 방 하나를 얻었다."

"가성비 별로죠?"

"나쁘다. 그래도 문은 됐다."

오수완: 오늘도 수선 완료 4화 30쪽 삽화

주하은은 벽에 기대어 천천히 앉았다.

서율은 물을 건넸다. 종이컵은 없었다. 로비에 두고 왔다. 대신 총무팀 누군가가 컵을 가져왔다. 아주 작은 친절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구경꾼이던 사람이 움직였다는 점에서 작지 않았다.

공덕장이 마지막 알림을 띄웠다.

[무해문 1단계 개방]

[공덕방 활성화]

[속인록 1명 등록]

[보호 예정자 1명 차단 성공]

그리고 아래에 더 작은 문구가 붙었다.

[개설자 기억 결손: 오늘 오전 11시 18분-11시 24분]

서율은 그 시간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빈칸이 생겼다. 조금 무서웠지만, 지금 울 시간은 아니었다.

류하진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다음 일정이 바뀐다."

공덕방 화면 맨 아래에 붉은 문서가 새로 접혔다.

`연화검증_004`

`대상: 무해문 내부`

`시작 시각: 지금`

재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선배, 공덕방 안에 가짜 요청이 섞였어요.`

서율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좋아요. 그럼 이번엔 우리가 먼저 찾아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