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월드

웹소설 · 8클래스 마법사는 연기기 외문제자가 되었다

5화. 비무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적화문과의 세 판 비무가 다가오자 선우혁은 칼보다 먼저 규칙, 비무장, 관중, 금지 조항을 손본다. 청허문은 아직 약하지만, 약한 쪽이 먼저 판을 짜면 싸움은 조금 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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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루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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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는 연기기 외문제자가 되었다 5화 대표 삽화
8클래스 마법사는 연기기 외문제자가 되었다 5화 1쪽 삽화

청허문의 다섯째 아침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외문제자들은 훈련장에 모였지만, 아무도 목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대신 모두 땅을 닦고 있었다. 돌을 치우고, 먼지를 쓸고, 금 간 비무대 주변에 줄을 치고 있었다.

조문기는 빗자루를 들고 서서 선우혁을 노려보았다.

“사제.”

“예.”

“우린 지금 수련 중인가?”

“그럼요.”

“내가 보기엔 청소 중인데?”

선우혁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사형의 눈이 좋아졌군요. 청소 중인 척하는 수련입니다.”

조문기가 입을 벌렸다.

옆에서 당소미가 약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거짓말할 때 얼굴이 조금도 안 변하네. 병이야?”

“직업병입니다.”

전생에 카일은 왕국군 회의에서 온갖 말도 안 되는 작전을 통과시켰다. 마왕군 후방에 구멍을 뚫기 위해, 수도 방위 예산을 ‘축제 안전 관리비’로 처리한 적도 있었다.

전쟁은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장부와 도장과 애매한 문구가 칼보다 세다.

오늘 청허문이 하는 일도 그쪽이었다.

선우혁은 낡은 붓을 들어 비무대 바닥을 가리켰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비무장을 고칩니다.”

남궁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비무장을 고친다고 실력이 오르진 않는다.”

“맞습니다.”

“또 인정부터 하지 마라.”

“하지만 비무장을 고치면 상대 실력이 조금 내려갑니다.”

그 말에는 모두가 빗자루질을 멈췄다.

좋다.

이제 집중한다.

목 장로가 산문 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에는 적화문 특유의 불꽃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인장은 크고 화려했다. 종이가 아까울 정도로.

목 장로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적화문에서 비무 세칙을 보내왔다.”

외문제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세칙.

이 세계에서 그 단어는 보통 약한 쪽에게 불리한 말이었다. 강한 문파는 늘 규칙을 좋아한다. 자기들이 만든 규칙 안에서 싸우면 이길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선우혁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읽어 보겠습니다.”

남궁린이 손을 뻗었다.

“내가 먼저 보겠다.”

“왜요?”

“검수의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저는 함정의 조건을 확인해야 합니다.”

둘은 잠시 봉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유설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둘 다 보면 된다.”

합리적인 말은 가끔 싸움을 짧게 만든다.

봉투 안에는 세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첫째, 비무는 세 판. 둘째, 살수 금지. 셋째, 외부 진법 금지. 넷째, 부적 사용 제한. 다섯째, 비무대 밖 도움 금지.

목 장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외부 진법 금지라니. 우혁아, 네가 쓰려던 건…….”

“외부 진법이 아닙니다.”

선우혁은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안전 설비입니다.”

당소미가 눈을 깜박였다.

“말장난 아냐?”

“법률입니다.”

백하령이 멀리서 접선을 폈다.

“흥미롭군요. 말장난에 값을 붙이면 법률이 되기도 하죠.”

선우혁은 그녀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말이 통하는 사람은 귀하다.

돈이 들긴 하지만.

백하령은 그날 점심 전에 적화문 쪽 정보를 들고 왔다.

정확히는 정보와 영수증을 함께 들고 왔다.

“세 판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자들입니다.”

그녀는 낮은 탁자 위에 세 개의 작은 나무패를 놓았다. 글자는 적지 않았다. 대신 각 나무패 위에 색이 다른 끈이 묶여 있었다. 붉은 끈, 검은 끈, 회색 끈.

“첫째, 권철. 힘으로 밀어붙이는 연기기 칠성. 땅을 밟는 순간 상대 중심을 무너뜨립니다.”

남궁린은 검자루를 고쳐 잡았다.

“내가 상대한다.”

백하령은 웃었다.

“둘째, 마연. 독침과 부적을 함께 씁니다. 손이 빠르고, 말이 더 빠르답니다.”

당소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독침?”

“예. 약당 입장에서는 불쾌한 장사죠.”

“불쾌한 장사는 장사가 아니야. 범죄지.”

당소미는 드물게 도덕적인 말을 했다. 선우혁은 살짝 감동할 뻔했다.

백하령은 마지막 나무패를 밀었다.

“셋째, 적운. 검수입니다. 적화문 젊은 세대 중 가장 정석에 가깝고, 그래서 가장 피곤합니다.”

유설하의 시선이 움직였다.

남궁린도 반응했다.

검수 둘이 동시에 조용해지는 순간, 주변 공기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선우혁은 나무패 셋을 보았다.

힘, 독, 검.

아주 정직한 구성이다.

정직해서 더 수상했다.

“적화문이 이렇게 깔끔하게 나올 리가 없는데요.”

목 장로가 물었다.

“그럼?”

선우혁은 붉은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종이 끝에 아주 희미한 재 냄새가 남아 있었다.

마나의 냄새와 닮은, 기분 나쁜 잔향이었다.

“세 판은 표면이고, 진짜 목적은 비무대 밑일지도 모릅니다.”

비무대는 청허문 산문 아래 낡은 낙운대였다.

옛날에는 제법 유명한 장소였다고 한다. 청허문 내문 제자들이 입문 비무를 치르고, 장로들이 차를 마시며 재능 있는 아이를 골랐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낙운대는 반쯤 무너져 있었다.

돌계단은 삐뚤었고, 난간은 빠졌고, 중앙 바닥에는 오래된 금이 가 있었다. 이름은 구름이 내려앉는 대라는데, 현실은 빗물이 고이는 대에 가까웠다.

선우혁은 그 금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유설하가 옆에 섰다.

“여기서 새어 나간 영기가 느껴져.”

“저도요.”

“느낄 수 있나?”

“아뇨. 계산상 그렇습니다.”

유설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가끔 네 말은 거짓말보다 더 이상하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니다.”

선우혁은 바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금 아래쪽에서 텅 빈 소리가 났다. 낙운대 밑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오래된 진법실이거나, 물길이거나, 누군가 일부러 파 둔 틈일 것이다.

전생의 마법진도 그랬다.

겉으로는 원 하나.

밑에는 수십 개의 보조 회로.

눈에 보이는 선만 보면 죽는다.

남궁린은 낙운대 중앙에 서서 검을 뽑았다.

“여기서 싸우면 발이 밀린다.”

“그래서 좋습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는 발이 밀릴 걸 알고 있고, 저쪽은 모르게 만들 겁니다.”

남궁린은 아주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정정당당한 사람에게 비대칭 정보는 거의 독초다.

당소미는 낙운대 한쪽에 약상자를 내려놓고 선우혁의 손목을 잡았다.

“열 난다.”

“기분 탓입니다.”

“손목에서 기분이 나?”

“제 몸은 감성이 풍부해서요.”

당소미는 대답 대신 붕대를 당겼다. 선우혁은 짧게 비명을 삼켰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네 번째 별점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별점인지 염증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우혁은 그것을 써야 했다.

대마법사의 회로 이론을 영기 세계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면, 몸에 맞지 않는 문을 열어야 한다. 손목의 네 번째 빛은 그 문고리 같았다.

문고리가 손을 물어뜯는 것이 문제였다.

당소미는 약상자 잠금쇠를 딸깍 닫았다.

“오늘 세 번 이상 쓰면 약값 두 배.”

“너무합니다.”

“네가 네 몸을 물건처럼 쓰니까 나도 가격표를 붙이는 거야.”

선우혁은 말문이 막혔다.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유설하가 옆에서 물었다.

“그 별점, 정말 제어할 수 있나?”

“제어는 못 합니다.”

“그럼?”

“협상 중입니다.”

남궁린이 멀리서 말했다.

“몸과 협상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선우혁은 붕대 감긴 손목을 들었다.

“대부분의 몸은 주인보다 현명합니다. 문제는 제 몸이 저를 싫어한다는 거죠.”

당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알 것 같아.”

선우혁이 낙운대에 그은 첫 선은 아주 평범해 보였다.

둥근 안전선.

관중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표시.

세칙에는 외부 진법 금지라고 되어 있었지만, 관중 안전선 금지라고는 되어 있지 않았다. 청허문은 가난했지만, 관중이 다치면 더 가난해진다. 그러니 안전선은 필요했다.

필요한 것은 늘 강하다.

선우혁은 푸른 영석분을 얇게 뿌렸다.

“이 선은 진법이 아닙니다.”

목 장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냐?”

“겉으로는 아닙니다.”

“속으로는?”

“예의상 묻지 말아 주세요.”

목 장로는 먼 산을 보았다. 장로가 되면 못 들은 척하는 기술이 는다.

백하령은 이미 계산을 끝낸 얼굴이었다.

“관중석을 만들면 입장료를 받을 수 있겠군요.”

“안 됩니다.”

“왜죠?”

“청허문 이름으로 받으면 적화문이 꼬투리를 잡습니다.”

백하령은 접선을 접었다.

“그럼 상단 이름으로 그늘막 이용료를 받겠습니다.”

선우혁은 잠시 침묵했다.

“천재십니까?”

“상인입니다.”

당소미가 끼어들었다.

“약차도 팔자.”

“좋습니다. 다만 해독제는 따로.”

“그건 당연하지.”

남궁린은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비무가 장터가 되고 있다.”

선우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장터가 된 비무는 싸움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조문기와 외문제자들은 돌을 옮겼다.

처음에는 모두 불평했다.

당연했다. 어제는 발을 보라더니, 오늘은 돌을 보라고 한다. 훈련의 방향성이 지나치게 낮았다.

하지만 돌을 옮기다 보니 묘한 효과가 있었다.

비무대 가장자리의 낮은 턱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어느 돌이 밟으면 흔들리는지 알게 됐다. 어느 곳에 먼지가 잘 쌓이는지 알게 됐다.

조문기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거, 진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선우혁은 바로 손뼉을 쳤다.

“사형이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비꼬냐?”

“칭찬입니다. 제 칭찬은 보통 비꼼과 닮았습니다.”

외문제자들이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그것도 중요했다. 겁에 질린 사람은 몸이 굳는다. 웃는 사람도 약하지만, 적어도 숨은 쉰다.

유설하는 외문제자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말했다.

“발이 덜 흔들린다.”

선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이 만든 판이니까요.”

“소유감?”

“더 원초적입니다. 어디서 넘어질지 아니까 덜 무섭습니다.”

유설하는 잠시 낙운대를 보았다.

“약한 쪽의 자신감은 정보에서 시작된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그럼 너는?”

“저는 늘 정보가 부족해서 자신감이 과잉입니다.”

유설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선우혁은 못 본 척했다.

가끔은 귀한 장면을 보관해야 한다.

그날 오후, 낙운대 밑에서 붉은 쇠못 하나가 나왔다.

조문기가 돌을 들추다 발견했다. 손가락 길이의 쇠못이었다. 겉보기에는 녹이 슬어 있었지만, 끝부분만 이상하게 깨끗했다.

당소미가 즉시 외쳤다.

“손대지 마!”

조문기는 이미 손을 뻗던 중이었다.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네 손이 비싸 보여서가 아니라, 내 일이 늘어나니까.”

“말이 참 따뜻하다.”

선우혁은 긴 집게로 쇠못을 들어 올렸다. 손목의 네 번째 별점이 아주 작게 찌릿했다.

역시.

붉은 쇠침과 같은 계열이다.

다만 이건 공격용이 아니라 측량용에 가까웠다. 영기의 흐름을 찌르고, 방향을 읽고, 낡은 진법의 약한 곳을 찾는 물건.

전생으로 치면 마법진 해킹용 기준점이었다.

선우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쪽도 낙운대 밑을 보고 있습니다.”

목 장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비무를 취소해야 하느냐?”

남궁린이 단호히 말했다.

“취소는 안 된다. 물러나면 끝이다.”

유설하도 고개를 저었다.

“취소하면 적화문이 명분을 얻어.”

선우혁은 쇠못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는 웃었다.

“대신 저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줍시다.”

당소미가 얼굴을 찌푸렸다.

“또 나쁜 얼굴이다.”

“전략적인 얼굴입니다.”

“둘이 거의 같은데.”

선우혁은 가짜 선을 그었다.

진짜 안전선 안쪽에, 아주 희미한 보조선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 선은 제대로 된 진법이 아니었다. 보기에는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영기를 조금 흩뜨리는 장난에 가까웠다.

문제는 장난도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정보가 된다는 점이다.

적화문의 쇠못이 그 선을 읽으면, 청허문이 낙운대 중앙에 힘을 모은다고 판단할 것이다.

사실 청허문이 힘을 모을 곳은 중앙이 아니었다.

관중석 아래였다.

목 장로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관중석 아래에?”

“예. 저쪽은 비무대만 볼 겁니다. 관중은 배경이라고 생각하겠죠.”

“관중을 이용하는 건 위험하지 않으냐?”

“그래서 안전선입니다. 사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을 이용합니다.”

목 장로는 이해한 듯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하령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공간을 파는 장사와 닮았군요.”

“그쪽 표현으로는 그렇습니다.”

“좋아요. 제가 관중 동선을 짜죠.”

“비싸겠죠?”

“당연하죠.”

선우혁은 하늘을 보았다.

가난은 늘 창의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창의력은 종종 더 비싸다.

유설하는 낙운대 북쪽 숲에서 작은 재를 발견했다.

붉은 종이학이 타고 남은 재였다. 4화에서 산문 앞에 떨어졌던 것과 같은 결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남겨진 흔적처럼 보였다.

선우혁은 재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마나 냄새.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했다.

이 세계의 영기와 다르다. 전생의 마법과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누군가 이쪽의 영기와 저쪽의 회로를 억지로 섞고 있었다.

그 결과가 붉은 쇠못이고, 쇠침이고, 종이학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설하가 물었다.

“또 그 냄새냐?”

선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싫어하는 냄새입니다.”

“전생과 관련 있나?”

“아마요.”

유설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불편했다. 캐묻는 사람은 밀어내면 된다. 기다리는 사람은 어렵다.

선우혁은 재를 작은 병에 담았다.

“누군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연비아?”

“이름은 아직 확정하면 안 됩니다.”

“너는 이미 확정한 얼굴인데.”

“얼굴 관리에 실패했습니다.”

유설하는 숲 너머를 보았다.

“도와주는 건가?”

선우혁은 병을 흔들었다.

붉은 재가 병 안에서 작게 반짝였다.

“도와주는 척하면서 시험하는 겁니다. 고약한 취미죠.”

그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솔직히 남 일 같지는 않습니다.”

당소미는 그 말을 듣고 선우혁을 약당으로 끌고 갔다.

말 그대로 끌고 갔다. 선우혁은 저항했지만, 당소미의 손아귀는 생각보다 강했다. 약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붙잡는 법을 잘 안다.

“누워.”

“지금 바쁩니다.”

“누워.”

“낙운대가…….”

“낙운대가 네 장례식장 되기 전에 누워.”

선우혁은 얌전히 누웠다.

말에는 힘이 있다.

특히 장례식장이라는 단어는 매우 강하다.

당소미는 그의 손목 붕대를 풀었다. 네 번째 별점은 전보다 선명했다. 작은 푸른 점이 피부 아래에서 박동하듯 빛났다.

“이거, 커졌어.”

“성장기인가 봅니다.”

“네 손목이 아이야?”

“반항기는 맞습니다.”

당소미는 약침을 꺼냈다.

선우혁은 즉시 몸을 굳혔다.

“잠깐. 그건 협상 없이 들어오는 물건 아닙니까?”

“몸하고 협상한다며. 내가 통역해 줄게.”

“통역 방식이 폭력적인데요.”

“의학이 원래 그래.”

약침이 들어가자 손목의 열이 조금 가라앉았다.

선우혁은 천장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약 냄새, 낡은 나무 냄새, 당소미가 장부 넘기는 소리. 이상하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당소미는 약병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죽으면 약값 못 받아.”

“그래서 살려 주는 겁니까?”

“반은.”

“나머지 반은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아직 실험 결과가 아까워.”

선우혁은 웃었다.

이 세계의 걱정은 참 이상한 포장을 하고 온다.

남궁린은 약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을 품에 안은 채였다. 자세만 보면 문병이 아니라 결투 신청에 가까웠다.

선우혁이 나오자 그녀가 물었다.

“너는 검을 믿나?”

“좋은 질문입니다.”

“피하지 마라.”

“저는 검을 믿습니다. 단, 남의 손에 들려 있을 때요.”

남궁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가 직접 들면?”

“그때는 검이 저를 믿지 못합니다.”

당소미가 뒤에서 말했다.

“정확한 자기 평가네.”

남궁린은 잠시 침묵했다. 평소라면 바로 화를 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낙운대 쪽에 가 있었다.

“적운이라는 자. 내가 상대하고 싶다.”

“왜요?”

“정석 검수라 했다.”

“그래서요?”

“정석은 무너지면 크게 흔들린다.”

선우혁은 조금 놀랐다.

“그거 제가 할 말인데요.”

“네 방식이 싫다고 했지, 전부 틀렸다고 하진 않았다.”

남궁린은 검집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만 검을 모욕하는 방식은 쓰지 않겠다.”

“상대를 화나게 하는 말은?”

“그건 검을 모욕하지 않는 선에서 하겠다.”

선우혁은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남궁 소저가 성장했습니다.”

“베어도 되나?”

“감동이 짧았습니다.”

유설하와 남궁린은 낙운대에서 맞섰다.

실전 비무는 아니었다. 발의 간격, 검로의 진입, 안전선과 중앙 금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연습이었다.

하지만 검수 둘이 마주 서면 주변 공기는 알아서 긴장한다.

유설하의 검은 조용했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었다. 물처럼 흐르다 어느 순간 날카로워졌다.

남궁린의 검은 곧았다.

몰락한 가문의 자존심이 아직 검끝에 남아 있었다. 금이 간 청월검은 선우혁이 고친 뒤로 푸른 빛을 아주 희미하게 품고 있었다.

두 검이 한 번 부딪쳤다.

소리는 작았지만, 외문제자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선우혁은 멀찍이서 손뼉을 쳤다.

“좋습니다. 두 분 다 훌륭합니다. 그러니 제발 비무 전에 서로 이기려 하지 마세요.”

남궁린이 검을 내리지 않고 말했다.

“확인 중이다.”

유설하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나도.”

선우혁은 당소미를 보았다.

“저 둘은 확인이라는 단어 뜻이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당소미는 약상자를 열었다.

“다치면 돈 받으면 돼.”

“당 소저, 가끔 너무 안정적입니다.”

“가난한 종문에서 안정적인 건 장부뿐이야.”

그 말은 이상하게 모두의 가슴을 쳤다.

외문제자 하나가 조용히 빗자루를 더 꽉 쥐었다.

백하령은 저녁 무렵 더 큰 장부를 들고 왔다.

선우혁은 그 장부를 보자마자 뒷걸음질쳤다.

큰 장부는 보통 좋은 일이 아니다.

“왜 도망가시죠?”

“상인에게 장부는 무기니까요.”

“정확히 보셨네요.”

백하령은 장부를 펼쳤다. 거기에는 관중 동선, 그늘막 위치, 약차 판매 자리, 외문제자 대기 구역, 적화문 사절 대기 구역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리된 글씨는 아름다웠다.

비용은 더 아름답지 않았다.

선우혁은 숫자를 보고 눈을 감았다.

“이건 폭력입니다.”

“합의된 폭력은 계약입니다.”

“아직 합의 안 했습니다.”

“곧 하실 겁니다.”

백하령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리고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청허문이 세 판 중 한 판도 못 이긴다는 쪽에 돈이 몰렸습니다.”

조문기가 발끈했다.

“우리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모두가 조문기를 보았다.

조문기는 잠시 후 말했다.

“말해 놓고 보니 이해는 되네.”

선우혁은 턱을 문질렀다.

“배당이 높습니까?”

백하령의 눈이 반짝였다.

“높죠.”

당소미가 바로 물었다.

“우리한테 걸 수 있어?”

남궁린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말했다.

“비무를 앞두고 도박을 하겠다는 거냐?”

선우혁은 상대의 빈틈을 먼저 훑었다.

“도박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남궁린은 머리를 짚었다.

청허문은 점점 그녀가 알던 무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8클래스 마법사는 연기기 외문제자가 되었다 5화 15쪽 삽화

그날 밤, 선우혁은 공개 훈련을 열었다.

공개라고 해 봐야 적화문 첩자들이 몰래 볼 수 있게 일부러 등불을 켜 둔 것이다. 청허문에는 원래 숨길 만한 대단한 기술이 없었으니, 숨기는 척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었다.

외문제자들은 일부러 어설프게 움직였다.

발을 헛디디고, 목검을 놓치고, 서로 부딪쳤다.

조문기는 특히 잘했다.

그는 평소 성격 그대로 화를 내면 됐다. 연기가 필요 없었다.

“이 정도면 정말 못하는 것처럼 보이겠죠?”

선우혁이 묻자 유설하가 대답했다.

“절반은 진짜니까.”

“진실이 섞인 거짓이 가장 강합니다.”

“그 말은 맞다.”

남궁린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그녀도 알아챈 것이다. 숲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보고 있었다.

적화문 첩자 둘.

그들은 청허문의 공개 훈련을 보고 아주 만족한 듯 사라졌다.

선우혁은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너무 친절하면 의심받는다.

당소미는 약병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쪽이 정말 속을까?”

“완전히 속진 않을 겁니다.”

“그럼?”

“반만 속으면 됩니다. 나머지 반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걸 믿을 테니까요.”

백하령이 접선을 탁 접었다.

“사람은 손해 볼 때보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을 때 더 크게 당하죠.”

선우혁은 그녀를 보았다.

“혹시 제 전생 상관이셨습니까?”

“그분도 장사를 잘하셨나요?”

“아뇨. 배신을 잘했습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끝맛은 조금 썼다.

진짜 훈련은 모두가 잠든 뒤 시작됐다.

낙운대 아래쪽에 작은 등불 세 개가 켜졌다. 선우혁, 유설하, 남궁린, 당소미, 조문기, 그리고 선발된 외문제자 넷만 남았다.

선우혁은 바닥에 세 개의 표식을 만들었다.

힘.

독.

검.

“권철은 발로 중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니 발을 강하게 막지 말고, 밀릴 길을 정해 둡니다.”

그는 낮은 턱을 가리켰다.

“밀리면 여기로 갑니다. 밀려난 척하며 숨을 고르고, 상대가 따라 들어오면 옆에서 끊습니다.”

조문기가 물었다.

“비겁한데?”

“생존형입니다.”

“좋네.”

남궁린은 한숨을 쉬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선우혁은 두 번째 표식을 가리켰다.

“마연의 독침은 손을 봐야 합니다. 손이 빠른 사람은 어깨보다 손목이 먼저 말합니다. 당 소저.”

당소미가 작은 약병을 던졌다.

“해독제 아냐. 손 저리게 하는 약이야.”

외문제자들이 조용히 그녀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당소미는 상처받지 않았다.

선우혁은 마지막 표식을 봤다.

“적운은 정석 검수. 제일 어렵습니다.”

남궁린이 앞으로 나왔다.

“내가 한다.”

이번에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네 번째 별점은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졌다.

선우혁은 손목을 들어 낙운대 안전선에 영기를 흘렸다. 원래라면 단전에서 시작해 경맥을 타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의 단전은 찢어져 있고, 경맥은 아직 약했다.

그래서 손목을 우회로로 썼다.

영기는 별점을 지나며 이상한 모양으로 꺾였다.

선협세계의 진법은 보통 원과 방위로 움직인다. 그런데 선우혁의 회로는 선과 각도, 겹치는 층으로 움직였다.

유설하는 그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청허문의 진법이 아니야.”

“맞습니다.”

“적화문의 것도 아니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럼 뭐지?”

선우혁은 손목을 털었다.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제가 고향에서 쓰던 계산법입니다.”

“고향?”

“아주 멀죠.”

유설하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가끔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

선우혁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달빛 아래 푸른 선이 낙운대 바닥을 지나갔다. 그 선은 진법 같기도 하고, 마법진 같기도 했다. 두 세계 사이에서 삐걱거리는 다리처럼.

그는 가볍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청허문 외문제자입니다.”

유설하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대답이 아니야.”

“제가 가진 대답 중 가장 싸게 먹히는 겁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손목은 결국 버티지 못했다.

푸른 선이 낙운대 끝까지 닿는 순간, 선우혁의 손끝이 떨렸다. 시야가 살짝 기울었다.

당소미가 바로 그의 뒤통수를 잡았다.

“넘어지면 약값 추가.”

“사람이 쓰러지는데 첫마디가 그겁니까?”

“쓰러지기 전에 말했으니 예방이지.”

선우혁은 반박할 힘이 없었다.

남궁린이 다가왔다.

“무리하지 마라.”

그 말이 의외로 부드러웠다.

선우혁은 눈을 깜박였다.

“방금 걱정입니까?”

“비무 전 전력을 잃으면 곤란하다.”

“아, 전술적 걱정.”

“그리고…….”

남궁린은 말끝을 흐렸다.

유설하가 대신 말했다.

“죽으면 귀찮다.”

당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장례비도 든다.”

백하령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접선을 폈다.

“저는 투자 회수가 안 됩니다.”

선우혁은 네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감동이 네 방향에서 이상한 모양으로 날아왔다.

그는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살겠습니다. 이렇게 경제적, 전술적, 행정적으로 요구받으면 살아야죠.”

조문기가 중얼거렸다.

“저런 식으로 걱정받는 것도 재주다.”

선우혁은 인정했다.

재주라기보다는 업보다.

무연사 지붕 위에는 붉은 재가 흩어졌다.

연비아는 부서진 기와 위에 앉아 청허문 쪽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가씨. 왜 경고를 보내셨습니까?”

연비아는 대답 대신 손가락 사이에서 종이학의 남은 재를 흘렸다.

재는 바람을 타고 붉게 빛났다.

“열리면 재미없어.”

“청허문이요?”

“낙운대 아래.”

사내는 고개를 더 숙였다.

“그곳이 열리면 적화문이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적화문도 정확히 몰라. 자신들이 문을 여는 줄 알지, 안쪽에서 무엇이 보는지는 모르거든.”

연비아는 웃었다.

그 웃음은 예뻤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우혁. 그 아이는 냄새가 달라.”

“청허문 외문제자입니다.”

“겉껍데기는.”

그녀의 붉은 눈이 아주 잠깐 더 깊게 빛났다.

“옛 회로가 몸 안에서 삐걱거려. 영기도 아니고 마기도 아니고, 마나와도 달라. 오래된 전쟁의 냄새야.”

사내는 침묵했다.

연비아는 청허문 쪽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죽이면 답이 끊겨. 살려 두면 문이 열린다. 어느 쪽이 더 재밌을까?”

잠시 뒤, 그녀는 스스로 답했다.

“아직은 살려 두자.”

붉은 재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다음 날 아침, 적화문 사자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붉은 도복을 입은 젊은 수사 둘이 함께였다. 그들은 낙운대를 훑어보며 대놓고 비웃었다.

“청허문은 비무보다 장터 준비가 바쁜가 봅니다.”

조문기가 이를 갈았다.

선우혁은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왜?”

“저쪽 대사 연습한 겁니다. 반응해 주면 보람차잖아요.”

조문기는 입을 다물었다.

사자는 붉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적화문은 공정한 비무를 위해 추가 조건을 제안한다. 비무 중 모든 진법 금지. 모든 부적 금지. 모든 약물 금지. 비무 전 무기 검수.”

목 장로의 얼굴이 또 창백해졌다.

남궁린의 손이 검집으로 갔다.

당소미는 약물 금지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선우혁은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아주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적화문 사자도 잠시 멈칫했다.

“정말인가?”

“예. 비무 중이면 안 쓰겠습니다.”

선우혁은 두루마리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다만 비무 전 관중 안전 조치와 의료 대기 조치는 비무 중이 아니죠?”

사자의 표정이 굳었다.

백하령이 접선 뒤에서 조용히 웃었다.

종이는 이미 싸움터였다.

그리고 방금 첫 칼이 들어갔다.

적화문 사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가 가져온 조건이 오히려 청허문에게 숨구멍을 만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선우혁은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공정한 비무를 위해 관중이 다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안전선은 유지하겠습니다. 의료 대기는 비무 후 처치를 위해 필요합니다. 무기 검수는 좋습니다. 저희도 적화문 무기를 검수하겠습니다.”

사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청허문이 우리 무기를?”

남궁린이 앞으로 나섰다.

“공정한 비무라 하지 않았나.”

그녀가 검수의 얼굴로 말하자 힘이 있었다.

유설하도 조용히 덧붙였다.

“독침이 무기가 아니라면 더 문제고.”

당소미가 약병을 들었다.

“약물 금지라면서 독은 괜찮다고 할 건 아니지?”

사자는 잠시 후 이를 악물었다.

“좋다. 양측 검수로 한다.”

선우혁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한 줄 얻었다.

무기 검수.

그것은 적화문이 숨겨 둔 침과 쇠못을 꺼낼 기회이기도 했다.

사자가 돌아서자 조문기가 낮게 물었다.

“우리가 이긴 거냐?”

“아뇨.”

선우혁은 두루마리를 접었다.

“싸움 시작 종을 우리가 먼저 친 겁니다.”

조문기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좋은 거네.”

“보통은요.”

“보통이 아니면?”

“제가 아픕니다.”

당소미는 약병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약값 세 배.”

“왜 또 오릅니까?”

“위험수당.”

목 장로는 그날 오후 선우혁을 따로 불렀다.

장로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방이 너무 작았다. 책상 하나, 낡은 향로 하나, 삐걱거리는 의자 둘. 청허문의 현실이 아주 정직하게 놓여 있었다.

목 장로는 한참 말이 없었다.

선우혁은 기다렸다.

나이 든 사람의 침묵에는 보통 둘 중 하나가 있다. 지혜거나, 계산이거나. 목 장로에게는 둘 다 조금씩 있었다.

“우혁아.”

“예.”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선우혁은 눈을 깜박였다.

“광산 가기 싫어서요.”

“그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들켰다.

선우혁은 창밖을 보았다. 낙운대에서는 외문제자들이 돌을 나르고 있었다. 조문기는 또 화를 내고 있었고, 당소미는 약차 가격을 정하고 있었고, 남궁린은 검을 닦고 있었다. 유설하는 말없이 주변 경계를 살피고, 백하령은 이미 장터 절반을 지배한 얼굴이었다.

전생의 전장에서도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군가 배신했다.

이번에도 그럴까?

선우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망한 곳은 편합니다.”

목 장로가 고개를 들었다.

“편하다?”

“더 잃을 게 적잖습니까. 그래서 이상한 짓을 해도 됩니다.”

“그게 이유냐?”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여기 사람들은 아직 저를 찌르지 않았습니다.”

목 장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괜찮다.

전부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

비무 전날, 청허문은 축제처럼 바빠졌다.

정확히는 축제보다 가난했고, 장례식보다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 중간쯤이면 청허문다운 분위기였다.

백하령의 상단은 그늘막을 세웠다. 돈을 받은 만큼 천이 넓어졌다. 당소미는 약차와 해독제를 구분해 놓았다. 가격표는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을 생각인 듯했다.

선우혁은 그것을 보고 물었다.

“가격표는요?”

“상황표야.”

“그게 더 무섭습니다.”

외문제자들은 관중 동선을 정리했다. 조문기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기 돌 밟지 마! 넘어지면 우리가 약값 물어야 해!”

놀랍게도 잘했다.

그의 성격은 지휘에 적합했다.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서라도 움직인다.

남궁린은 낙운대 중앙에서 적운의 검로를 상상하며 발을 옮겼다. 유설하는 북쪽 숲을 계속 살폈다. 붉은 재의 흔적은 더 보이지 않았다.

선우혁은 안전선 마지막 부분에 영석분을 뿌렸다.

손목이 뜨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았다.

당소미가 무섭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보다 감시 앞에서 더 조심해진다.

그는 마지막 선을 잇고 작게 말했다.

“좋아. 문은 열리지 말고, 귀만 열어라.”

푸른 안전선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낙운대 밑에서 무언가가 대답하듯 낮게 울렸다.

그 울림을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우혁, 유설하, 그리고 연비아의 종이학 재를 병에 담아 본 당소미 정도였다.

당소미는 즉시 선우혁의 팔을 잡았다.

“방금 뭐야?”

“아마 오래된 진법실입니다.”

“아마?”

“혹은 무덤.”

“말을 왜 그렇게 골라?”

“좋은 선택지가 없어서요.”

유설하가 바닥에 손을 댔다.

“아래에 기척이 있다. 살아 있는 건 아니야.”

“죽은 것도 아니겠죠.”

“그 둘 말고 뭐가 있지?”

선우혁은 잠시 생각했다.

전생의 마왕성 지하에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장치들이 많았다. 기억을 먹고 움직이는 문, 영혼의 잔향으로 열리는 회랑, 주인의 명령이 끝났는데도 계속 돌아가는 방어식.

낙운대 아래의 울림도 그 계열일 수 있었다.

다만 이 세계의 이름으로는 뭐라 부르는지 몰랐다.

“오래된 명령.”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유설하는 그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오래된 명령.”

당소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명령을 깨우지 마.”

“그래서 안전선을 그은 겁니다.”

“안전선이 명령을 막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럼?”

“들어오는 순간, 알 수 있습니다.”

당소미는 한참 그를 보더니 말했다.

“진짜 너랑 일하면 늘 막장 직전이네.”

“막장 바로 전이 제 전문 분야입니다.”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

비무 당일 아침, 산문 밖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허문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대부분은 구경꾼이었다. 어떤 이는 적화문의 승리를 보러 왔고, 어떤 이는 망한 종문이 얼마나 망했는지 확인하러 왔다.

그리고 몇몇은 돈 냄새를 맡고 왔다.

백하령은 그들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그늘막은 이쪽입니다. 약차는 저쪽. 비무대 안전선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호위들의 어깨는 부드럽지 않았다.

당소미는 약차 솥 앞에 앉아 있었다.

“두통, 긴장, 과호흡, 독침 의심. 증상별로 가격 달라.”

구경꾼 하나가 물었다.

“독침 의심은 왜 비싸요?”

“살아나면 싸다고 느낄 거야.”

그는 조용히 돈을 냈다.

선우혁은 그 장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허문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다.

방향은 조금 이상하지만.

남궁린은 비무대 옆에서 검을 품고 섰다. 유설하는 북쪽 관중석 뒤쪽, 조문기는 외문제자들을 지휘하며 줄을 세웠다.

목 장로는 떨리는 손으로 청허문 깃발을 세웠다.

깃발은 낡았다.

하지만 오늘은 쓰러지지 않았다.

선우혁은 그걸 보고 작게 웃었다.

“이 정도면 첫인상은 괜찮네요.”

당소미는 약병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첫인상만.”

“시작이 반입니다.”

“나머지 반에서 보통 죽어.”

정확한 지적이었다.

적화문은 정오 직전에 도착했다.

붉은 도복, 붉은 깃발, 붉은 수레.

색 하나로 밀어붙이는 데도 위압감이 있었다. 돈이 있으면 단순함도 전략이 된다.

적화문 선두에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적화문 집법당주, 염도였다. 그는 낙운대를 훑어본 뒤 입꼬리를 올렸다.

“청허문이 제법 꾸몄군.”

목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공정한 비무를 위해 준비했소.”

염도는 웃었다.

“공정이라.”

그의 시선이 선우혁에게 닿았다.

“네가 그 외문제자냐?”

선우혁은 공손히 포권했다.

“청허문 외문제자 선우혁입니다.”

“외문제자가 종문 일을 너무 많이 맡는군.”

“인력이 부족해서요.”

구경꾼 몇 명이 웃었다.

염도의 눈이 차가워졌다.

선우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저 사람은 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관중 앞에서 행동이 제한된다. 관중이 많을수록 더 그렇다. 백하령의 그늘막 사업은 생각보다 훌륭한 전술이었다.

염도는 낙운대 중앙을 보았다.

“안전선이라.”

“예. 관중 보호용입니다.”

“진법은 아니겠지?”

선우혁은 아주 맑게 웃었다.

“당주께서 그렇게 의심하실 줄 알고, 양측 검수를 제안드립니다.”

염도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선우혁은 알았다.

두 번째 칼도 들어갔다.

무기 검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적화문은 청허문 검을 꼼꼼히 보려 했다. 남궁린의 청월검 앞에서 특히 오래 머물렀다. 검신에 남은 푸른 빛을 트집 잡을 생각이 분명했다.

남궁린은 눈빛으로 대련장의 거리를 재었다.

“수리 흔적이다.”

적화문 수사가 비웃었다.

“수리한 검으로 비무에 나오는가?”

“금 간 검도 베는 법을 잊지 않는다.”

관중석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선우혁은 속으로 박수쳤다.

좋다. 남궁린은 가끔 대사가 매우 좋다. 단, 자기가 멋있는 줄 모르는 게 문제다.

청허문 쪽 검수도 시작됐다.

당소미가 마연의 소매를 잡았다.

“손목.”

마연은 웃었다.

“약당 계집이 무례하군.”

“독 쓰는 놈한테 예의 차리면 내가 손해야.”

구경꾼들이 또 웅성거렸다.

마연의 웃음이 얇아졌다.

당소미는 그의 소매 안쪽에서 아주 작은 붉은 침집을 찾아냈다.

적화문 쪽이 즉시 소리쳤다.

“치료용 침이다!”

당소미는 침 하나를 꺼내 냄새를 맡았다.

“치료용이면 네가 먼저 맞아.”

마연은 입을 다물었다.

관중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선우혁은 염도를 보았다.

염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세 번째 칼.

아직 비무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적화문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검수 소동이 끝나갈 무렵, 권철이 낙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몸집이 컸고, 걸음마다 돌바닥이 낮게 울렸다.

그 울림에 맞춰 낙운대 밑의 오래된 명령도 아주 작게 반응했다.

선우혁의 손목이 찌릿했다.

안전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유설하가 북쪽에서 눈짓했다. 그녀도 느꼈다.

염도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권철의 발이 세 번째로 바닥을 밟는 순간, 낙운대 아래 붉은 쇠못 하나가 푸르게 빛났다. 아주 희미해서 일반 관중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혁은 봤다.

보게 만들었으니까.

가짜 중앙선이 적화문의 시선을 붙잡는 동안, 진짜 안전선은 낙운대 아래의 반응을 관중석 쪽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위험이 아니라 신호만.

선우혁은 손목을 누르며 웃었다.

“찾았다.”

당소미가 바로 물었다.

“뭘?”

“저쪽이 열려고 하는 문 손잡이요.”

“그걸 왜 웃으면서 말해?”

“손잡이를 찾았으면 문을 잠글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열 수도 있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필요한 만큼의 불안만 줘야 한다.

첫 비무 순서가 정해졌다.

적화문에서는 권철.

청허문에서는 조문기가 나섰다.

구경꾼들이 크게 술렁였다. 조문기 본인도 크게 술렁였다.

“나?”

선우혁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형이 제일 잘합니다.”

“뭘?”

“밀리는 것.”

조문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고 싶냐?”

“지금은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형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조문기는 잠시 멈췄다.

평소 같으면 바로 욕했을 텐데, 오늘은 목검을 꽉 쥐었다. 그의 발등 붕대는 이제 거의 풀려 있었다. 상처는 다 나았지만, 기억은 남아 있었다.

선우혁은 붓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권철은 첫 발로 중심을 부숩니다. 사형은 부서지는 척하세요.”

“진짜 부서지면?”

“당 소저가 있습니다.”

당소미가 뒤에서 말했다.

“살리는 건 별도 비용.”

조문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청허문 진짜 망했네.”

“그래서 이겨야죠.”

남궁린은 조문기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설하는 안전선 너머를 보고 있었다. 백하령은 관중석의 흐름을 잡았다.

목 장로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종을 들었다.

선우혁은 낙운대 아래 푸른 점을 보았다.

비무는 이제 시작된다.

하지만 싸움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됐다.

8클래스 마법사는 연기기 외문제자가 되었다 5화 30쪽 삽화

종이 울렸다.

권철이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의 발이 바닥을 찍었다. 낙운대가 낮게 울렸다. 관중들이 숨을 삼켰다.

조문기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선우혁은 안전선 밖에서 붓을 쥐었다.

세칙상 비무 중 외부 진법은 금지다.

그러나 안전선은 이미 그어져 있었다. 의료 대기도 이미 준비됐다. 관중 동선도 이미 잡혔다. 적화문의 독침 하나는 이미 들켰고, 쇠못 하나는 이미 위치가 드러났다.

비무 중에 무엇을 하지 말라는 규칙은 많았다.

비무 전에 무엇을 해 두면 안 된다는 규칙은 적었다.

선우혁은 작게 웃었다.

“역시.”

당소미가 옆에서 물었다.

“뭐가 역시야?”

“싸움은 시작 전에 반쯤 끝납니다.”

권철의 첫 발이 낙운대 중앙을 찍었다.

조문기의 몸이 뒤로 밀렸다.

관중들이 탄식했다.

하지만 조문기의 발은 선우혁이 정해 둔 낮은 턱 바로 앞에서 멈췄다. 밀린 것이 아니라, 밀려날 곳으로 간 것이다.

낙운대 밑 붉은 쇠못이 푸른 안전선에 걸려 아주 작게 흔들렸다.

유설하의 검끝이 북쪽 숲을 향했다.

남궁린의 손이 청월검을 눌렀다.

백하령의 접선이 조용히 닫혔다.

그리고 선우혁의 손목 네 번째 별점이 짧게 빛났다.

“좋아.”

그가 중얼거렸다.

“첫 수는 우리가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