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 8클래스 마법사는 연기기 외문제자가 되었다
2화. 영맥은 새고, 약값은 오른다
퇴출 시험은 넘겼지만 청허문은 여전히 망해 간다. 선우혁은 새는 영맥과 더 새는 약값 사이에서 첫 거래 상대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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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문의 종은 원래 거의 울리지 않았다.
울릴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줄이 자주 끊겼기 때문이다. 외문제자들은 종소리를 들으면 세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밥이 줄었다. 빚쟁이가 왔다. 아니면 누가 또 영맥 앞에서 허세를 부리다 쓰러졌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종소리와 함께 산문 아래 돌계단이 푸르게 번쩍였다. 빛은 아주 짧았다. 기침 한 번 할 시간도 못 버티고 꺼졌다. 그래도 선우혁의 몸 안에 박힌 별점 세 개는 동시에 움찔했다.
오른쪽 옆구리.
왼쪽 허리.
등 아래.
세 곳이 뜨거워졌다가 식었다.
선우혁은 방금 퇴출 시험을 통과한 몸으로, 방금 다시 죽을 뻔한 표정을 지었다.
“좋지 않은 소식이네요.”
유설하가 물었다.
“왜?”
“방금 제 몸이 종보다 먼저 반응했습니다.”
당소미가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그럼 진료비도 종보다 먼저 내.”
세상은 참 꾸준했다.
시험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외문제자들은 영맥이 살아났다고 떠들었고, 교두는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고, 조문기는 발등 붕대를 감싼 채 선우혁을 노려보았다. 발등 하나 다친 사람이 세상 억울한 얼굴을 하니 꽤 볼만했다.
“저놈이 뭔가 한 거 아닙니까?”
조문기는 목검을 어색하게 고쳐 쥐었다.
선우혁은 손을 들었다.
“제가요? 저는 방금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네가 이상한 호흡법을 썼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제 호흡법이 청허문 영맥보다 튼튼하면 그건 종문 문제가 더 큽니다.”
몇몇 외문제자가 웃음을 참았다. 교두의 미간이 깊어졌다. 웃어도 되는 말인지, 화내야 하는 말인지 판단이 안 서는 얼굴이었다.
그때 내문 쪽에서 회색 도포를 입은 중년인이 내려왔다. 목운 장로. 청허문에서 재정과 창고를 맡은 사람. 선우혁의 기억 속 평판은 간단했다. 장부는 잘 보는데 책임은 못 본다.
목운 장로가 물었다.
“방금 영맥 반응을 일으킨 자가 누구냐?”
시선이 모두 선우혁에게 꽂혔다.
선우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시험은 통과해도 인생은 낙제다.
목운 장로는 선우혁을 영맥당으로 데려갔다.
영맥당이라 부르기엔 건물이 너무 낡았다. 문짝은 삐걱거렸고, 기와는 듬성듬성 빠졌고, 안쪽 향로에는 향보다 먼지가 많았다. 중앙에는 푸른 옥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청허문의 영맥석. 종문의 숨통이자, 지금은 거의 장식품이었다.
옥석 표면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선우혁은 그것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마나석과 비슷했다. 하지만 기운의 결이 다르다. 마나석이 빛을 안에 가두는 유리라면, 영맥석은 물길을 기억하는 돌이었다.
그런데 물길이 끊긴 게 아니었다.
방향이 틀어져 있었다.
“흠.”
선우혁은 아주 작게 소리 냈다.
목운 장로가 날카롭게 보았다.
“무엇을 보았느냐?”
“아직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방금 흠이라 하지 않았느냐?”
“저는 자주 흠합니다. 병입니다.”
당소미가 뒤에서 작게 말했다.
“입병.”
유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이 늘어난 것 같은데, 어째 다 적군이었다.
목운 장로는 영맥석 앞에 세 사람을 세워 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청허문의 영맥은 십 년 전부터 약해졌다. 장문인께서 비경 조사를 나간 것도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후 장문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영맥은 더 말랐다.”
말은 길었지만 핵심은 짧았다.
망했고, 이유를 모른다.
선우혁은 영맥석 주변 바닥을 보았다. 오래된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선협식 진법. 획은 단순해 보였지만 층이 많았다. 마법진처럼 계산식이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대신 기운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읽어야 했다.
그는 무심코 말했다.
“마른 게 아니라 새는 겁니다.”
공기가 굳었다.
유설하가 눈을 크게 떴다. 당소미는 장부를 든 손을 멈췄다. 목운 장로의 얼굴은 아주 천천히 붉어졌다.
“외문제자가 영맥을 논하느냐?”
선우혁은 그제야 자기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전생의 습관이었다. 틀린 회로를 보면 일단 욕부터 나오는 병.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입이 먼저 수련했습니다.”
유설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연기기 9성쯤 되겠네.”
목운 장로는 선우혁을 바로 쫓아내지 않았다.
그건 관대해서가 아니었다. 청허문에는 쫓아낼 사람도 부족했고, 방금 영맥이 반응한 것도 사실이었다. 망해 가는 조직은 이상한 가능성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증명해라.”
목운 장로는 긴 소매 안쪽으로 손을 감췄다.
“무엇을 말입니까?”
“영맥이 마른 것이 아니라 샌다는 네 말.”
선우혁은 잠깐 생각했다.
“증명하면 뭐가 나옵니까?”
목운 장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종문을 위한 일에 보상을 먼저 따지느냐?”
“네.”
너무 빨리 대답한 탓에 유설하가 이마를 짚었다. 당소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육의 효과였다.
목운 장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증명하면 외문 창고의 폐부적을 열 장 가져가도 좋다.”
“스무 장.”
“열두 장.”
“열여덟 장.”
“열다섯 장.”
“거기에 깨진 약로 하나.”
목운 장로가 당소미를 보았다.
당소미는 약상자 잠금쇠를 딸깍 닫았다.
“그건 제가 받을 겁니다. 약값 대신.”
선우혁은 깨달았다.
이 세계에는 마왕보다 장부가 더 무섭다.
영맥당에서 나온 뒤, 당소미는 곧장 선우혁의 앞을 막았다.
“정산.”
“아직 아무것도 못 받았습니다.”
“받을 예정이잖아.”
“예정으로 약값을 냅니까?”
당소미는 품에서 작은 장부를 꺼냈다. 종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이미 그의 이름이 여러 줄 적혀 있었다.
냉월초 여섯 장.
상처약 세 병.
진통산 두 봉.
약당 의자 사용료.
선우혁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의자도 돈을 받습니까?”
“네가 피 묻혔어.”
“의자에게 사과하겠습니다.”
“의자는 돈을 좋아해.”
유설하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약값을 다 받을 생각이야?”
당소미는 아주 진지하게 답했다.
“사람은 믿어도 장부는 믿으면 안 돼. 장부는 계속 늘어나거든.”
선우혁은 감탄했다.
“훌륭한 철학입니다.”
“칭찬 말고 돈.”
전생에 왕국 재정관도 이 정도로 집요하진 않았다. 물론 그 재정관은 카일이 실험실을 한 번 폭발시킨 뒤로 말을 잃긴 했다.
유설하는 선우혁을 외문 서고로 데려갔다.
서고는 이름만 서고였다. 책보다 벌레 먹은 죽간이 많았고, 죽간보다 먼지가 많았다. 그래도 선우혁은 기뻤다. 지식은 지식이었다. 곰팡이가 피어도 회로도는 회로도다.
그는 청허문 영맥도와 산세도를 꺼냈다.
유설하는 한 걸음 물러나며 길을 막았다.
“네 말이 맞다면 영맥이 어디로 새는지 찾아야 해.”
“맞다면이 아니라 맞습니다.”
“확신이 너무 빨라.”
“틀린 회로는 냄새가 납니다.”
“회로가 또 나왔네.”
선우혁은 대답 대신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청허문 산문 아래로 흐르던 영맥은 원래 세 갈래였다. 하나는 내문, 하나는 약당 뒤편 약초밭, 하나는 외문 훈련장 아래.
그런데 지도 끝에 이상한 지선이 있었다.
흑석광산.
지금은 퇴출자들을 보내는 노역지. 오래전에는 청허문이 직접 관리하던 영석 채굴지였다고 적혀 있었다.
선우혁은 작게 웃었다.
“아주 친절하군요.”
유설하가 물었다.
“뭐가?”
“문제 있는 곳에 이름표까지 붙어 있습니다.”
문제는 길이었다.
흑석광산은 산 아래쪽에 있었다. 외문제자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 방금 퇴출 시험을 간신히 통과한 외문제자가 영맥이 샌다며 광산을 뒤지는 건, 상식적으로 미친 짓이었다.
선우혁은 상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직접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폐부적 더미를 펼쳤다. 청결부, 온열부, 발광부, 방습부. 대부분 반쯤 타거나 획이 끊긴 것들이었다. 보통은 버릴 물건. 그에게는 부품이었다.
“영맥 청진부를 만들 겁니다.”
유설하가 물었다.
“청진?”
“몸에 대고 맥을 듣는 도구가 있잖습니까.”
“의원들이 쓰는 청진침?”
“그 비슷한데, 덜 찌르고 더 터질 겁니다.”
“터지면 안 되잖아.”
“아직 설계 중입니다.”
당소미가 옆에서 냉월초 잎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터지면 약값 추가.”
선우혁은 붓을 들었다.
“여러분은 저를 살리고 싶은 겁니까, 팔고 싶은 겁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침묵했다.
침묵이 더 무서웠다.
첫 번째 영맥 청진부는 훌륭하게 실패했다.
부적은 푸르게 빛났고, 잠깐 진동했고, 그다음 선우혁의 얼굴에 검은 재를 뿜었다. 아주 정확하게 코와 이마만 칠했다. 부적이 인격을 갖고 있다면 분명 성격이 나쁠 것이다.
당소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효과는 있네. 얼굴 청소는 안 되지만.”
유설하는 수건을 건넸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실패가 이 정도면 친절한 편입니다.”
“전생에도 자주 터졌어?”
선우혁의 손이 멈췄다.
유설하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냥 던진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보고 있었다. 그의 말투, 지식, 반응, 이상한 비유들.
선우혁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습니다.”
“거짓말.”
“그럼 맞다 보니 풍부해졌습니다.”
“그건 조금 믿기네.”
첫 화에서 한 번 통했던 답이 또 통했다. 재활용 가능한 거짓말은 좋은 거짓말이다.
두 번째 청진부는 터지지 않았다.
대신 서고 바닥 아래에서 희미한 파동을 잡았다.
방향은 산문 바깥이었다.
그때 청허문 산문에 손님이 왔다.
손님이라기엔 행렬이 너무 반짝였다. 하얀 비단 마차, 은색 종이 달린 말, 질서 있게 늘어선 상단 호위. 망해 가는 청허문 앞에서는 거의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마차에서 내린 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백하령.
선우혁은 기억 속 이름을 찾았다. 백운상단 상단주의 딸. 청허문에 약재와 곡물을 대고, 동시에 청허문이 갚지 못한 빚의 절반쯤을 쥐고 있는 사람. 웃는 얼굴로 이자를 계산할 수 있는 부류였다.
그녀는 흰 비단 장갑을 끼고 접선을 들고 있었다. 옷차림은 화려했지만 걸음은 가벼웠다. 눈은 웃고 있었고, 머리는 이미 장부를 넘기고 있을 것 같았다.
“청허문 외문이 오늘도 무사하군요.”
목운 장로가 굳은 얼굴로 맞았다.
“백 소저. 약속한 날은 아직 사흘 남았습니다.”
백하령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사흘 전에 왔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서로 마음이 상하잖아요.”
선우혁은 상대의 빈틈을 먼저 훑었다.
“저분은 웃으면서 독을 바르는 타입이군요.”
당소미는 장부에 보이지 않는 값을 먼저 계산했다.
“비싼 독.”
백하령의 시선이 선우혁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부적에 닿았다. 반쯤 탄 청결부와 방습부를 이어 붙인 이상한 부적. 겉보기에는 쓰레기를 예쁘게 접은 것에 가까웠다.
“그건 무엇인가요?”
선우혁은 부적을 등 뒤로 숨겼다.
“실패작입니다.”
“실패작을 그렇게 조심히 숨기나요?”
“성공작은 더 비싸게 숨깁니다.”
백하령의 눈이 웃었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이름이?”
“선우혁입니다. 외문제자.”
“아, 오늘 퇴출 시험을 통과했다는 분.”
소문이 너무 빨랐다. 돈을 다루는 사람들은 정보도 돈처럼 굴리는 모양이었다.
백하령은 접선 끝으로 부적을 가리켰다.
“제가 그 실패작을 사도 될까요?”
목운 장로가 끼어들었다.
“백 소저, 외문제자의 장난감일 뿐입니다.”
선우혁은 장로를 보았다.
장난감.
좋은 단어였다. 장난감은 어른들이 얕보고, 아이들은 끝까지 가지고 논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팔 수는 있습니다. 다만 아직 터질 수 있습니다.”
백하령은 접선을 반쯤 접고 웃음을 숨겼다.
“터지는 상품은 보통 가격이 내려가죠.”
“아뇨. 구경값이 붙습니다.”
백하령은 바로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웃음도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선우혁을 한 번, 부적을 한 번, 낡은 산문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결론을 냈다.
“시연해 주세요.”
“시연료가 있습니다.”
유설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너 방금 장로 앞에서 상단주 딸에게 시연료를 요구한 거야?”
“돈 많은 사람에게 요구해야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당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
백하령은 호위에게 손짓했다. 작은 은전 세 닢이 선우혁 앞에 놓였다. 당소미의 눈이 은전보다 먼저 빛났다.
“그 돈은 우선 약값으로.”
“아직 제 손에 닿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깨끗해.”
선우혁은 은전 하나를 슬쩍 당소미 쪽으로 밀었다. 당소미는 조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만으로 만족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다음 사냥을 위해 참는 표정이었다.
그는 청진부를 산문 바닥에 붙였다.
부적이 푸르게 떨렸다.
그리고 산 아래 방향을 가리켰다.
백하령의 웃음이 아주 조금 사라졌다.
“흑석광산 쪽이네요.”
백하령이 먼저 말했다.
목운 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그곳은 지금 백운상단이 담보로 잡은 땅입니다.”
“정확히는 담보 예정지죠.”
백하령은 접선을 접었다.
“청허문이 사흘 뒤까지 곡물 대금과 약재 대금을 갚지 못하면, 산 아래 폐광 일부를 저희가 임시 관리하게 됩니다.”
임시 관리.
선우혁은 그 말을 싫어하기로 했다. 대륙에서도 귀족들은 빼앗는 일을 관리라고 불렀다. 단어가 고급스러우면 범죄도 향이 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는 물었다.
“그 폐광에 최근 공사를 했습니까?”
백하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궁금하죠?”
“영맥이 그쪽으로 새고 있습니다.”
목운 장로가 버럭 말했다.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선우혁은 청진부를 들어 보였다. 부적 끝이 산 아래를 향해 계속 떨렸다.
“증명은 아니고, 부적의 손가락질 정도는 됩니다.”
백하령이 조용히 웃었다.
“좋아요. 그 손가락이 어디까지 가리키는지 보죠.”
유설하는 검집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눌렀다.
“위험해.”
선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같이 가시면 됩니다.”
“내가 왜?”
“위험하니까요.”
논리는 가끔 뻔뻔할수록 강하다.
산문 밖 작은 장터에서 선우혁은 준비물을 모았다.
준비물이라 해 봐야 폐부적, 끊어진 붓, 금 간 약병, 냉월초 잎 두 장, 그리고 당소미가 끝까지 돌려주지 않은 은전 두 닢 중 하나였다. 대마법사 시절이었다면 실험 준비 목록에 넣지도 않았을 물건들이다.
하지만 없는 자원은 상상력으로 때운다.
그는 청진부를 세 장 더 만들었다.
백하령은 옆에서 지켜보다가 품에서 작은 부적 하나를 꺼냈다.
“이것도 봐 줄 수 있나요?”
선우혁은 받자마자 알았다. 일부러 망가뜨린 저장부였다. 안쪽 획 하나가 반대로 꺾여 있었다. 시험이었다.
그는 붓을 들고 선 하나를 더했다.
“고장 난 게 아니라, 고장 난 척하는 겁니다.”
백하령의 눈이 웃었다.
“어떻게 알았죠?”
“너무 예쁘게 망가졌습니다. 진짜 망가진 물건은 더 억울하게 생겼습니다.”
당소미는 소매에 묻은 약초 가루를 털었다.
“너처럼?”
선우혁은 잠깐 생각했다.
“네. 제 단전이 아주 억울하게 생겼죠.”
백하령은 저장부를 받아 들고 말했다.
“선우 공자, 거래를 좀 아시네요.”
“아직 약값도 못 갚았습니다.”
“그래서 더 잘 아는 거죠.”
반박할 수 없었다.
흑석광산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조용한 길은 보통 두 종류다. 정말 안전하거나, 다들 위험해서 안 가거나. 선우혁의 경험상 후자가 훨씬 흔했다.
유설하는 앞장섰다. 허리의 목검이 아니라 진검을 찼다. 검집은 낡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녀의 걸음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당소미는 약상자를 등에 메고 투덜거렸다.
“내가 왜 따라와야 해?”
선우혁은 붓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제가 쓰러지면 치료해야 하니까요.”
“그럼 더 비싸.”
“비싸도 살아 있어야 갚죠.”
“그건 맞아.”
백하령은 호위 둘을 데리고 뒤를 걸었다. 비단신이 흙길에 닿는데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돈 많은 사람은 흙도 덜 묻는 걸까. 선우혁은 불공평한 세계의 새 증거를 발견했다.
길 중간에서 청진부가 갑자기 떨렸다.
푸른 빛이 아래로 꺾였다.
선우혁은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눈앞에는 평범한 돌무더기뿐이었다.
유설하는 한 걸음 물러나며 길을 막았다.
“아무것도 없어.”
“보통 중요한 건 그렇게 숨어 있습니다.”
당소미는 약상자 잠금쇠를 딸깍 닫았다.
“돈도?”
“돈은 보통 남의 장부에 숨어 있더군요.”
돌무더기를 치우자 쇠못이 나왔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검은 쇠못. 표면에는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선협식 부적도, 청허문 진법도 아니었다. 아주 낯선데, 선우혁에게는 낯익었다.
마법진.
정확히는 마법진의 흉내.
그는 숨을 멈췄다. 문양의 꺾임이 전생의 어느 기억을 긁었다. 마왕성 검은 왕좌 아래. 용사의 검이 그의 가슴을 찌르던 순간, 천장에 숨겨 둔 회귀식 아래에서 보았던 보조문양.
있을 수 없는 흔적이었다.
이 세계에는 마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마나 회로의 잔재가 여기에 있는가.
백하령이 물었다.
“아는 물건인가요?”
선우혁은 표정을 가볍게 만들었다.
“모르는 물건인데, 아주 싫게 생겼습니다.”
유설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에도 넘어가지 않는 눈이었다.
당소미는 쇠못을 자세히 보다가 말했다.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맞습니다.”
선우혁은 웃었다.
“그래서 건드리는 방법을 잘 골라야죠.”
검은 쇠못은 영맥의 흐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직접 뽑으면 역류가 생긴다. 청허문 영맥석이 더 깨질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의 경락이 타 버릴 수도 있다. 물론 가까운 사람은 보통 선우혁일 확률이 높았다. 그는 자기 운을 그 정도로 믿었다.
“뽑지 않습니다.”
유설하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행이네.”
“대신 방향을 바꿉니다.”
“전혀 안 다행이네.”
선우혁은 폐부적 세 장을 꺼냈다. 발광부, 온열부, 방습부. 원래 용도는 제각각이었다. 그는 세 부적을 삼각형으로 배치했다. 별점 세 개와 같은 구조. 마법진으로 치면 역상 안정식이었다.
백하령이 흥미로운 눈으로 보았다.
“그게 성공하면 어떻게 되죠?”
“새는 물길이 잠깐 돌아옵니다.”
“실패하면?”
“제가 좀 아픕니다.”
당소미는 약병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많이 아프면 추가.”
선우혁은 그녀를 보았다.
“당 소저는 제 생존보다 수익률에 관심이 많습니까?”
“둘은 연결돼 있어. 네가 살아야 계속 받지.”
이 정도면 격려로 쳐도 될까. 선우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그렇게 치기로 했다. 세상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유설하는 선우혁의 손목을 잡았다.
“무리하지 마.”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힘이 있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고, 손가락에는 검을 오래 쥔 굳은살이 있었다. 선우혁은 순간 대답을 늦췄다.
전생의 동료들은 강했다.
용사는 찔렀고, 성녀는 외면했고, 검성은 침묵했다. 믿는다는 말은 대체로 죽기 전에 가장 크게 들렸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유설하는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게 조금 더 위험했다.
사람이 마음을 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우혁은 가볍게 웃었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효율적인 고통을 추구합니다.”
유설하가 손을 놓았다.
“그 말도 이상해.”
백하령이 접선을 펼치며 말했다.
“두 분, 분위기는 좋은데 계약서에는 효율적인 고통 조항이 없습니다.”
당소미는 장부에 보이지 않는 값을 먼저 계산했다.
“넣으면 약값 받을 때 편하겠네.”
선우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 파티는 이상한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역류식은 조용히 시작됐다.
선우혁은 호흡을 낮췄다. 영기를 단전으로 모으지 않았다. 단전을 통과시켰다. 찢어진 곳에서 새려는 흐름을 세 갈래로 나누고, 별점에 잠깐 걸었다.
그리고 부적 세 장에 연결했다.
푸른 선이 땅 위로 떠올랐다.
동그라미가 아니었다.
삼각형.
유설하의 눈이 흔들렸다. 백하령은 접선을 멈췄다. 당소미는 약상자를 열어 두었다. 쓰러질 준비를 저렇게 현실적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검은 쇠못이 떨렸다.
산 아래로 빠져나가던 영기가 잠깐 멈췄다.
선우혁은 이를 악물었다. 오른쪽 옆구리가 불타는 듯했고, 왼쪽 허리는 얼음처럼 식었다. 등 아래에서는 누군가 돌을 얹은 듯했다.
아팠다.
하지만 계산 안에 있었다.
그는 손끝의 긴장을 천천히 풀었다.
“돌아와라.”
부적 세 장이 동시에 타올랐다.
푸른 빛이 산 위쪽으로 튀었다.
성공은 늘 예쁘게 오지 않는다.
이번 성공은 흙먼지와 함께 왔다. 돌무더기가 흔들리고, 땅속에서 오래된 방어 진법이 깨어났다. 작은 석상이 두 개 솟아올랐다. 팔도 짧고 다리도 짧은데, 주먹만큼은 단단해 보였다.
선우혁은 석상을 보고 말했다.
“귀엽게 생겼는데 아프게 때릴 것 같군요.”
석상이 바로 달려들었다.
역시 외모 판단은 위험하다.
유설하가 검을 뽑았다. 푸른 검광이 짧게 번쩍이며 첫 번째 석상의 팔을 쳐냈다. 백하령의 호위들이 두 번째 석상을 막았다. 당소미는 선우혁의 뒤로 물러나며 약병을 꺼냈다.
“저건 치료 못 해.”
“저도 맞고 싶지 않습니다.”
선우혁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몸이 늦었다. 별점 세 개가 방금 역류식을 버티느라 지쳐 있었다.
석상 하나가 유설하의 검을 피해 그의 쪽으로 튀었다.
선우혁은 손에 든 마지막 폐부적을 던졌다.
“발광부!”
부적이 번쩍였다.
석상도 멈췄다.
선우혁도 눈이 멀었다.
“아.”
그는 눈을 감고 말했다.
“사용자도 영향을 받는군.”
유설하가 석상을 베어 넘겼다.
정확히는 베었다기보다, 관절 틈을 찔러 움직임을 끊었다. 힘보다 정확함. 선우혁은 눈을 깜빡이며 그 움직임을 보았다. 검술은 문외한이지만, 구조는 알 수 있었다.
저 검은 예쁘게 이기는 검이 아니다.
살아남는 검이다.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석상은 백하령의 호위들이 묶어 두고 있었다. 백하령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땅에 떠오른 영기선을 유심히 보았다.
“이 흐름, 상품이 되겠네요.”
선우혁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공격받는 중입니다.”
“그래서 더 잘 팔려요. 위험한 상품은 이야기까지 붙거든요.”
“백 소저도 상당히 건강한 입을 가지셨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당소미가 선우혁의 입에 냉월초 잎을 밀어 넣었다.
“씹어.”
“맛이.”
“말하면 더 넣는다.”
선우혁은 조용히 씹었다.
석상이 무너지고, 땅 아래에서 묶여 있던 영기가 다시 산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
하지만 분명히.
청허문 산문 쪽에서 다시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줄이 끊기지 않았다.
푸른 빛이 산길을 따라 위로 번졌다. 풀잎이 고개를 들고, 마른 약초밭 끝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영맥이 완전히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맥이 다시 뛰었다.
목운 장로와 외문제자들이 멀리서 달려왔다.
조문기도 있었다. 발등이 아직 아픈지 절뚝이면서도 구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질투는 대단한 추진력을 가진다.
목운 장로가 검은 쇠못과 타 버린 부적들을 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선우혁은 땅에 주저앉은 채 손을 들었다.
“증명입니다.”
“무엇을?”
“영맥은 말라 죽은 게 아니라, 누가 빨대를 꽂았습니다.”
외문제자들이 웅성거렸다.
백하령은 상단 사람 특유의 느린 눈으로 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빨대가 저희 담보 예정지 안에 있었네요.”
목운 장로의 얼굴이 더 복잡해졌다.
선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좋다.
복잡한 얼굴은 협상의 시작이다.
목운 장로는 처음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말은 대체로 이랬다. 외문제자의 말만 믿을 수 없다. 부적이 검증되지 않았다. 쇠못의 출처를 모른다. 백운상단의 입장도 확인해야 한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지금 책임지기 싫다.
선우혁은 이해했다.
책임은 뜨거운 냄비와 같다. 손잡이가 없으면 아무도 잡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손잡이를 만들어 주면 된다.
그는 백하령을 보았다.
“백 소저, 청허문 영맥이 조금이라도 살아나면 약초 수확량이 오르겠죠?”
“그렇겠죠.”
“약초 수확량이 오르면 상단에 갚을 돈도 생기겠죠?”
“그럴 가능성이 있네요.”
“그럼 백운상단 입장에서는 영맥 복구를 막는 쪽보다 돕는 쪽이 이익입니다.”
백하령이 접선을 천천히 접었다.
“말을 참 예쁘게 하시네요. 돈 얘기라서 더 예뻐요.”
목운 장로가 끼어들었다.
“외문제자가 감히 상단과 종문의 계약을 논하느냐?”
선우혁은 고개를 숙였다.
“감히가 아니라, 가난해서입니다.”
가난은 때때로 아주 강력한 명분이었다.
결론은 임시 유예였다.
백하령은 흑석광산 담보 집행을 일주일 늦추기로 했다. 대신 청허문은 영맥 복구 가능성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선우혁은 백운상단에 자신이 고친 부적 다섯 장을 납품하기로 했다.
당소미는 그 자리에서 약값 일부를 선우혁의 몫에서 먼저 떼 갔다.
선우혁은 항의했다.
“아직 납품도 안 했습니다.”
“계약금이잖아.”
“제 계약금입니다.”
“네 몸에 들어간 약도 내 약이야.”
논리가 이상한데 반박하기 어렵다. 선우혁은 세상에 이런 식의 마법도 있구나 싶었다. 계약 마법. 아주 잔인한 학파다.
백하령은 선우혁에게 작은 목패를 건넸다.
“백운상단 출입패예요. 정식 거래 전까지는 임시로.”
“제가 신뢰를 얻은 겁니까?”
“아뇨. 관심을 얻은 거죠. 신뢰는 더 비쌉니다.”
선우혁은 목패를 받았다.
“좋습니다. 저도 비싼 건 천천히 사는 편입니다.”
백하령의 웃음이 깊어졌다.
“선우 공자, 정말 이상한 외문제자네요.”
“그 말은 오늘 세 번째 듣습니다.”
유설하가 옆에서 말했다.
“부족하게 들었네.”
산문으로 돌아오는 길, 선우혁은 네 번째 별점을 느꼈다.
아직 불씨도 아니었다. 오른쪽 손목 안쪽, 맥이 뛰는 자리 근처에서 아주 희미한 감각이 생겼다. 검은 쇠못을 돌려세울 때, 새어 들어온 영기가 그곳을 스쳤다.
새로운 저장점.
단전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고, 별점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렸다. 하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이다. 대마법사는 가능성을 보면 일단 주워 담는다. 나중에 터질지라도.
그는 손목을 만졌다.
유설하가 물었다.
“또 어디 아파?”
“아픈 건 기본값이고, 이번엔 조금 다릅니다.”
당소미가 즉시 다가왔다.
“새 증상?”
“새 자산입니다.”
“그럼 담보 잡을 수 있어?”
“사람 몸 안의 영기를 담보로 잡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당소미는 잠깐 생각했다.
“가능하면 잡았을걸.”
백하령이 뒤에서 말했다.
“상단에도 아직 그런 상품은 없어요.”
“아직이라는 말이 무섭군요.”
“시장은 늘 넓어지니까요.”
선우혁은 하늘을 보았다.
이 세계는 마나가 없지만, 채권자는 많았다.
청허문으로 돌아오자 외문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호의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 착해지지 않는다. 다만 선우혁을 비웃던 눈빛에 계산이 섞였다. 저놈이 정말 뭔가 할 줄 아는 건가. 가까이 두면 도움이 되는가. 빚은 얼마나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당소미 쪽에서 퍼뜨린 듯했다.
조문기가 다가왔다.
“운이 좋았군.”
선우혁은 그의 발등 붕대를 보았다.
“사형도 발등이 아직 붙어 있으니 운이 좋습니다.”
조문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다음 대련에서는 못 넘어가.”
“저도 다음에는 더 자연스럽게 넘어질 예정입니다.”
“뭐?”
선우혁은 웃으며 지나갔다. 지금 조문기를 이길 필요는 없다. 이겨 봐야 귀찮은 일이 늘어난다. 대신 조문기가 계속 화나 있게 두면 좋다. 화난 사람은 예측하기 쉽다.
유설하가 물었다.
“일부러 자극하는 거야?”
“조금요.”
“나쁜 버릇이네.”
“생존 기술입니다.”
“둘 다일 수 있어.”
그 말은 꽤 정확했다.
밤이 되자 선우혁은 약당 구석에서 부적을 고쳤다.
백운상단에 납품할 다섯 장. 청결부 둘, 방습부 하나, 온열부 하나, 저장부 하나. 원래라면 하급 부적이지만, 그는 획을 조금씩 바꾸었다. 기운이 덜 새고, 발동이 부드럽고, 쓰는 사람이 덜 피곤하게.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망해 가는 종문에는 작은 개선도 큰 돈이 된다.
당소미는 옆에서 약재를 말리며 물었다.
“너 진짜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요.”
“우리 서고 책은 벌레도 읽다 포기했어.”
“그럼 벌레보다 제가 끈기가 있나 봅니다.”
당소미는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유설하도 의심하더라.”
“유 소저는 원래 많이 의심하는 분입니다.”
“나는?”
“당 소저는 의심보다 계산이 빠릅니다.”
당소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칭찬으로 들을게.”
선우혁은 붓을 멈췄다.
당소미는 약병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죽지는 마. 약값 못 받잖아.”
아주 이상한 걱정이었다.
그래서 조금 덜 나쁘게 들렸다.
유설하는 늦은 밤에 찾아왔다.
손에는 검이 아니라 검은 쇠못에서 베껴 온 문양이 그려진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선우혁 앞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거 보고 네 표정이 변했어.”
선우혁은 종이를 보았다.
심장이 한 번 느리게 뛰었다.
그 문양은 분명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선협의 획이 아니고, 부적의 흐름도 아니다. 조잡하지만 마법진의 구조를 안다. 누군가가 마나 없는 세계에서 마법식을 흉내 냈다.
그리고 그 흉내는 전생의 회귀식 보조문양과 닮아 있었다.
선우혁은 가볍게 웃었다.
“제가 싫어하는 모양이라 그랬습니다.”
“왜 싫어?”
“죽기 전에 본 적이 있어서요.”
말하고 나서야 선우혁은 입을 다물었다.
유설하도 조용해졌다.
그는 급히 덧붙였다.
“비유입니다. 아주 심한 비유.”
유설하는 한참 그를 보았다.
“선우혁.”
“네.”
“너 가끔 농담으로 못 덮는 말을 해.”
선우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도 정확했다.
그날 밤, 선우혁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몸은 피곤했다. 별점 세 개는 쓰라렸고, 손목의 새 감각은 간지러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선우혁도 보통 사람 몸이었다. 문제는 머리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마왕성.
용사의 검.
성녀의 침묵.
검은 왕좌 아래의 보조문양.
그리고 선협세계의 흑석광산에 박혀 있던 검은 쇠못.
두 세계가 우연히 닮았을 가능성은 낮다. 누군가 연결했다. 혹은 무언가가 넘어왔다. 회귀식이 그를 이 세계로 던진 것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
선우혁은 종이에 세 줄을 적었다.
첫째. 별점 수련법 안정화.
둘째. 청허문 영맥 누수 원인 추적.
셋째. 약값 상환.
그는 세 번째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제일 어렵게 느껴졌다.
밖에서 밤바람이 불었다. 청허문의 낡은 처마가 삐걱거렸다. 망해 가는 소리였다. 하지만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직 고칠 수 있다.
아마도.
비싸겠지만.
다음 날 새벽, 산문 앞에 또 손님이 왔다.
이번에는 마차도 없고 호위도 없었다. 낡은 검 한 자루를 등에 멘 소녀가 혼자 서 있었다. 머리는 높게 묶었고, 옷은 먼지투성이였지만 자세는 반듯했다. 눈빛은 검날처럼 곧았다.
문지기 외문제자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소녀가 대답했다.
“남궁린.”
그 이름에 몇몇이 웅성거렸다. 남궁가. 몰락했지만 아직 검명은 남은 가문. 선우혁도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찾았다. 정면승부를 좋아하고, 뒤로 물러나는 법을 모르는 검수. 그러니까 선우혁과는 여러모로 상극일 사람.
남궁린은 산문 너머의 청허문을 보았다.
“여기가 망해 간다는 청허문인가?”
외문제자가 발끈하려는 순간, 그녀는 등에 멘 검을 내려놓았다. 검집에 금이 가 있었고, 검 손잡이에는 부서진 진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좋아.”
남궁린은 검자루를 고쳐 잡았다.
“망한 곳이면 고장 난 검도 고쳐 주겠지.”
마당 한쪽에서 그 말을 들은 선우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새벽부터 채권자, 상단, 검수.
이 세계는 정말 성실하게 귀찮았다.